우리 예지...<세자매네 반디농장>의 둘째 딸입니다.
제가 2005년도 1월에 귤밭을 구입하고나서
아이들과 귤밭 이름을 작명할 때
청정지역에만 산다는 반딧불이를 떠올리며
처음에는 제주도 말로 반딧불이가 <불란지>라고 하여서
불란지 농장이라 명명했었는데 사람들이 불란지가 뭐냐고 물으실 때마다
일일이 설명해주다가 보니 번거로와서
남들이 다 알아 듣는 <반디농장>이라고 정정 했었습니다.
유기농 귤밭에 반딧불이가 날아 다니는 꿈을 꾸며 지은 이름이지요.
그런데 반디는 누구나 부르는 명사인지라
우리만의 특징을 앞에 붙여서 <세자매네 반디농장>으로 다시 확정 지었습니다.
반디농장의 주체가 세자매가 된 것은
제가 세자매를 키우며, 꿈꾸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야기를 담고 싶어서였습니다.
큰 아이 예슬이가 6학년,둘째 예지가 4학년, 막내 예인이가 1학년때
서귀포로 이사와서 아이들이 자란만큼 반디농장도 함께 자랐습니다.
예슬이는 이제 대학 3학년이 되었고
둘째 예지도 이번에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집을 떠났습니다.
젊은 날에는 좀 더 크고 넓은 세상을 만끽하며 배우라고
등을 떠밀어서 내보낸 것은 아니고
엄마 맘은 가까운 학교에 가서 자주 보고 싶고
작은 소소한 행복들을 함께 자주 하고픈 맘이 있었지만
다 자랐다고 생각하는 아기새들은 둥지를 떠나 맘껏 날아 다니고픈 맘에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날아 가기를 원했습니다.
부모 품안에 늘 끼고 바라볼 수만은 없는 시기가 된 것이지요.
그동안도 제게 가장 큰 의미이고,
에너지의 근원이었던 아이들이었지만
이제는 엄마 품안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홀로서기 하는 것을 배우고
더 큰 날개짓을 배워야 할 때가 온 것이라
둥지 밖으로 밀어내는 연습을 첫째 예슬이에게서 한지라
둘째 예지가 집을 떠날 때는 불안감은 없었습니다.
아이 셋을 키워보니 한지붕아래 한솥밥을 먹고
한배에서 난 아이들인데도
어찌 그리도 다른 성향들인지
매일이 코미디요, 사건이요,드라마였습니다.
와글와글, 재잘재잘, 시끌법적,우당탕탕,...
정신이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하다가보니
얼이 반쯤은 빠져서 혼미해졌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태어날때부터 우량아에다가
에너지가 특별하여 감당하기 만만치가 않았던 둘째 예지는
키우면서 제게는 아주 벅찬 존재감이었지요.
"강적을 만났구나~"하며 장탄식을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첫째와 둘째를 합한 것에 두배이상의 사건사고 드라마를 연출했던 아이입니다.
아기때부터 자아의식이 강하고 독립적이어서
두살때 혼자 양치질 한다고 우기다가 치약거품이 기도로 들어가서
심장전기 충격을 받고 간신히 살아난 놈입니다.
(그때 내 간이 떨어졌다가 다시 붙여 놨었지요)
그 후로도 음식점 대형 통유리창에 온몸으로 부딫혀서
통유리가 와장창 내려앉았는데
한군데도 상처가 없는 운이 좋은 놈이기도 하였지요.
예지는 에너지가 다른 아이 두배 이상이다보니 식탐도 많아서
언니 동생 먹는 것을 넘보며 없어지기전에 빨리 먹느라고
잽싼 눈돌림하며 먹는 민첩한 행동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초우량아로 자랐습니다.
엄마 눈에는 여자아이가 비만아로 자라는게 걱정되어
물리적인 제제를 가하느라고 먹는 것을 감시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잘 안먹는 첫째 아이는 말라서 입이 돌아 갈 지경이고
너무 잘먹는 둘째 아이는 비만이 되어 걱정이고
너는 먹어라, 너는 그만 먹어라~매일이 생쑈현장이었습니다.
어릴때는 엄마가 주체가 되어 그래도 이끌어 갔지만
외계인 처럼 느껴지던 질풍노도의 사춘기가 들이닥쳐서
엄마인 제게 태풍 예지의 대반격이 시작되었지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예지는 제게 너무나 강력한 태풍이었고
자신도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에 갇히는 초강력태풍이 되었었지요.
그 사춘기의 5년동안 예지의 성적은 수직 추락하였고
엄마인 나는 내려놓고, 내려놓고, 또 내려 놓는 연습을 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건강한 것만도 어디냐~로 스스로 위안 삼게 되니까
제게 평안이 찾아 왔고 아이를 있는 그대로 봐줄 수가 있게 되었지요.
내 뜻대로 가지 않는 아이때문에 부대껴 하다가
아이의 그릇대로, 때가 되면 제 자리로 돌아 오리라는 여유를 갖게되자
비로소 관계회복이 되기 시작 했었지요.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노랑머리 외계인같은 갸루상을 보고
저게 바로 너구나~했던 것도 예지뿐이 아니고
요즘 아이들은 우리들이 살던 세상과는 다른 행성에 살고 있다는 느낌.
컴퓨터에 빠져서 헤어나오지를 못하다가
또 다시 손에 들고 다니는 컴퓨터(스마트폰)에 몰입한 자녀를
아날로그 시대를 살았고 지금도 그런 가치를 더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우리들 세대로서는 외계인같은 아이들이 걱정도 되지만
그것은 이 시대와 아이들의 문화일 뿐, 근본인 성품만 기본을 벗어나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홍역을 단단히 치룬 제게 찾아온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세자매 중에서 가장 튀는 아이,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
가장 가능성이 많은데도 길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이.
가장 자기 주장이 강하고 자기 중심적인 아이,
공부를 못했어도 저 많은 에너지가 긍정 에너지로 전환하면
큰 일을 할 것 같은 예감을 주는 아이,
엄마인 나를 늘 부대끼게 하던 아이.
엄마보다 목소리도 크고, 키도 크고, 몸무게도 더 나가던 아이.
강렬한 고흐의 그림같이 뜨거운 아이.
밋밋한 갈색머리는 싫다며 완전 샛노란 머리로 염색하여
엄마도 선생님도 깜짝 놀라게 한 아이,
파란 머리와 빨간머리까지 하겠다는 것을
자기몸을 실험도구로 사용하지 말라고 간신히 만류한 아이.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김춘추의 꽃이라고 인용하여
맨붕스쿨 캐릭터를 총망라한 놈이라며 핀잔 주어도
앞뒤 안맞는 말이라도 줏어넘기는데 청산유수인 놈.
하기 싫은 과목은 전교 꼴찌요, 좋아하는 과목은 전교 1등도 하던 아이.
미술전공한 언니보다도 더 가능성이 많다고 한 미술학원 원장님이 말했던 아이.
원색의 색감을 과감하게 응용하고 매치하여
유명화가 선생님께 가능성을 인정 받았던 아이.
배우지도 않았는데 사진을 너무 멋지게 찍어서
사진학과를 가라고 권유했던 아이.
전직 요리사였던 엄마의 미각을 놀라게 하는 절대미각 후각의 소유자.
가능성의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주던 아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개구리~
그 아이가 둘째 예지였습니다.
대학진학을 앞에 두고 예지가 선택할 곳은 많지 않았습니다.
떨어진 성적을 뒤늦게 만회하기가 쉽지 않아서
엄마만 애간장이 타는 듯, 배짱이 기질의 아이는 천하태평이었지요.
심지어 대학을 왜 가야하며 꼭 가야만 하는지가 이해가 안된다며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만 하며 컴퓨터에 몰입한 예지를
바라보는 엄마는 아득하다못해..줄을 놓아 버리고 싶었습니다.
잘살든 못살든 니 인생이니...나 몰라라 하고 싶었습니다.
괘씸한 놈...된통 고생을 해봐야 정신을 차릴라나...
심지어 그런 보복성 심정까지 몰려 왔습니다만
부모된 자 어찌 자식의 장래를 두고 화난다고 포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지막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희망줄을 놓을 수 없지요.
엄마인 저만 똥줄이 타서 이 궁리 저 궁리를 하였습니다.
자신만의 피안의 세계인 컴퓨터 게임에 새벽까지 빠진 아이를 바라보며
저는 결심했습니다.학교를 보내지 말고 고생을 시켜야겠다고요.
대학교는 나중에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 될 때 그때 가도 늦지 않는다...
아무 곳에나 성적에 맞춰 가거나, 남이 가니까 가는 학교는 사실 의미가 없지요.
그런 맘까지 먹고 나니까 저를 좀 진정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저는...혹시 아이가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릴까싶어서
눈은 뗄수가 없었지요.간간히 너가 꼭 하고 싶은게 뭐냐고 물어도
자신도 잘 모른다 하며 엄마 보기에 가능성이 보이는
사진학과나 조리과나, 미대를 운을 띄어도
부모가 가라는 데는 안가겠다는 심뽀인지 고개를 외로 꼬기만 하니
그 묵직했던 마음은 겪어본 사람들은 공감할겁니다.
웬수같은(^*^) 컴퓨터를 때려 부시고 싶은 맘 한두번 든게 아니니
동병상련의 우리 부모들...아마도 엄청 많을거라 생각 됩니다.^*^
고3 여름이 올때까지 예지는 그렇게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안되면 고졸학력으로 끝낸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맘이 편하지는 못했지요.
그런데 어느날 제가 웹서핑을 하다가 <한국농수산대학교>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농부가 되어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몰랐던 분야에서
여러가지 비전도 보이는지라 한국농수산대학의 여러가지 혜택까지 알고나니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듯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3년간 학비 꽁짜~
기숙사 식비 꽁짜~
2학년때 해외연수 실습
.....
그리고 이번 입학식 때 알게 된 것...남자들은 병역면제까지...
어머나 이런 학교도 다 있었던가?
아니 아니 눈 씻고 다시 보고 또 보고...
그런데...이 학교는 성적만 가지고는 못가는 학교.
(성적은 중간정도까지는 통과?)
미래 대한민국의 농업을 창조하고 짊어 질 자를 나라에서 양성하는 학교인지라
무엇보다도 확고한 신념이 첫째이고
그리고 부모의 영농기반이 점수에 반영되는 학교.
그리고...나에게...도전 희망을 불러일으킨 가장 눈에 번쩍 뜨인 문구...
면접볼때 부모 동반...오잉?
부모 동반...이라는 문구에... 희망의 찬가가 내 귀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 나이까지 오고보니...남은게 뱃짱이라(^*^)...
예지 성적도 간당간당, 영농기반도 간당간당하지만
부모동반 면접이라는 문구에 희망을 걸고 아이를 그때부터 설득했지요.
예지는 처음에는 농부가 된다하니까 그냥 1차 생산만 생각하고
싫다고 하더니 너희들 세대에서는 1차 생산만 해서는 안되고
2차 가공과 3차 서비스분야까지 해야하고
너는 특별한 미각과 컴활용능력과 사진도 잘 찍고 미적 감각이 있으니
그 모든 재능을 종합적으로 발휘하면 큰 경쟁력을 갖출 것이라고 설득하니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이 분야를 더 알고 나니까
농업은 나라의 기반산업이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보이는 생명산업분야라
장차는 더욱더 비젼이 있을거라고 하니 그때부터 예지도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리고 10월에 수시로 서류전형 통과하고 면접까지 논스톱으로 통과...
친구들 수능 준비하느라 쌍코피 터질때 우리 예지는 일찌감치 수시통과하여
타고난 배짱이 팔자의 복을 만끽 하게 되었지요.
물론 제가 면접때 동반하여...
안 붙여 주시면 63빌딩에서 뛰어내릴 기세의 의기충전함을 보여 드렸는데...ㅎㅎ...
내 생각엔 엄마의 영향력이 반드시 포함됐을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경쟁률 4.2:1이었으니 천하태평 예지는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예지의 대학 입학은 일찌감치 결정되어
저는 그때부터 그동안의 마음 시름을 다 내려 놓았습니다.
부모 맘대로 다 안되는 자식 농사...
애간장 녹는 부모 마음을 어찌 철없는 자식이 다 헤아리겠어요.
제가 농사수입으로 두아이가 대학생, 또 하나가 남았으니
그 학비 감당하려면 가랑이가 찢어질 판에
이렇게 나라에서 키워주는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으니 저도 입이 귀에 걸렸습니다.
일찌감치 대학이 결정된 예지이고 학교가 정해져서
지난 겨울 예지를 실전농사에 투입시켜서 겨우내내
귤 따고 나르고 택배하고 전 과정에 참여 시키면서
그동안 못다한 대화도 많이 하였습니다.
부모되는 과정의 지난함을 온 몸으로 일깨워 준 우리 둘째가
이렇게 운 좋게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예지는 반짝반짝하는 차세대 영농 후계자가 되기위해
한국농수산대학교에 28일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25일부터 오리엔테이션이 있어서 아이 동반하고 올라갔는데
오리엔테이션부터가 특별하였습니다.
신입생 전원이 해병대 훈련소에 입소하여 2박3일간
몸과 정신을 무장하고 와서 입학식을 하였거든요.
예지는 해병대 훈련에 지레 겁 먹고 걱정하는데
저는 희희낙락... 쾌재를 불렀습니다.
여학생 비중이 1/5정도 되는데 남자와 다름없이 해병대 훈련을 받았다 합니다.
고생 빡세게 하여 몸도 마음도 다시 태어나서
이 나라의 믿음직한 차세대 영농 후계자로 나라에서 키워 주시옵기를...
예지 입학식까지 보고 오려고 기다리는 동안에 저는 또나름 분주했었지요.
모처럼의 외출(일상탈출)이라 그 이야기 보따리도 가득하네요.
제가 힐링되어 온 이야기는 따로 풀어 놓지요.
예지의 입학식도 아주 특별했습니다.
여느 대학교 입학식과는 달랐습니다.
입학식때 초빙된 명강사님의 "영웅을 가슴에 품어라"는
부모인 제 가슴도 마구 뛰게 하였습니다.
<고난이 없는 성공이 없다>는 이야기는 예지보다 제 가슴을 더 뛰게 하였습니다.
아이야 무슨 고난이 있었겠습니까,고생안한 우리 아이들을 다시 만들어서
차세대 희망주자로 만드는 일을 나라에 맡겨놓고 돌아 왔지요.
이제 예지는 제가 놓은 주춧돌위에 더 단단한 반석을 만들어서
반디농장의 미래가 더욱 환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도 오랫만에 애국가도 부르고 국기에 대한 경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까지
경건하게 하고나니 마치 제가 신입생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창조 농수산업이라는 글씨는
390명 신입생이 촛불을 하나씩 켜서 불 밝힌 것입니다.
이 특별한 의식은 학부모인 제게도 가슴 뭉클한 의식이었습니다.
내 안에서 잠시 늘어져서 타성에 몸을 맡기려던 의식이
조용히 촛불처럼 불이 켜지더니
서서히 내 온 몸에 불을 붓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난을 이겨내고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얻는 벅찬 희열을
다시 한번 우렁차게 내 뿜으라는 내 안의 멧세지가 울려 퍼졌습니다.
입학식은 예지가 하였지만 제 맘속에도 다시 학생의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반디농장은 차세대 주자까지 나라에서 키워주시니
희망, 믿음, 기쁨, 사랑을 늘 샘솟게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다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가슴 벅찬 도전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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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서 메일을 열어보니 둘째 예지가 엄마에게 보낸 편지가 있었다.
어제 7월 14일...내 생일인 줄 알고 보낸 편지였다.
사실 내 생일은 음력인데 예지가 착각을 하여...
천지개벽할(^^) 변심을 하여 이런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이눔이 이제 좀 제 정신이 돌아 오는가싶어서
언제나 그렇듯 부모는 자식일에 콩깍지가 씌여서 감동답장을 쓰게 되었다.
그동안 내 블로그에 아이들 이야기가 가뭄에 콩나듯 하던 것도
내 뜻대로 되지도 않고,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던 딸들의 사춘기와 엄마의 사추기가 겹쳤기 때문이다.
35년전 나도 심하게 사춘기를 앓았기에 딸들의 사춘기를 겪으며 기다리는 것을 배우고 있었다.
특히나 둘째 예지는 어찌나 용을 써대는지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벅찼다.
성적이 떨어지는 것에 충격을 받던 것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하나씩 하나씩 무너져 내리던 기대치를 어느날은 둑이 무너진 봇물을 보듯
불가항력처럼 여기고 차라리 잡고있던 줄을 느슨하게 놓아 버렸다.
돌아올수 없는 곳까지만은 가지 말아라~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느긋하게 먹으니 오히려 관계가 조금씩 개선되는것 같았다.
아이를 내 식으로 끌어 당기면 당길수록 아이는 튕겨져 나가려고 하기에
그 어떤 잔소리도 효과는 커녕 역효과만 내는 것을 깨닫기까지
내가 다시 부모로 태어나는 진통의 과정이었다.
예지는 몸과 마음 에너지가 워낙 메가톤급이라서
사춘기를 보내는 동안 내가 예지때문에 한숨깨나 쉬었다.
아기때부터 식성도 여느 아이의 두배, 욕심도 두배...목소리도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듯 우렁찼다.
두돌도 되기전부터 주체성이 강해서 혼자 양치질 하다가
양치거품이 기도로 들어가서 기절하여 죽을뻔한 것을 전기충격으로 살아났다.
그때 혼비백산하여 아이를 안고 8차선 대로를 신호무시하고 병원을 향해 마구 내달리며
오직 아이만 살게해달라고 기도했었다.그 후에도 음식점에서
대형유리창에 부딪혀서 통유리를 다 깨고서도 상처 하나없이 말짱했던 하늘이 내린 운좋은 아이이기도 하다.
워낙이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라 이후 소소히 간 떨어지게 한 적은 셀수도 없다.
하느님이 날 길들이시려고 저런 인간을 보내셨나부다~며 땅을 치기도 했었다.
위로 아래로 두아이를 합친 것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자아 주장을 하는 아이.
가지 많은 나무가 작은 바람에는 의연해지는 과정을 나는 세아이의 엄마가 되어서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 거저 자라는 아이는 없다는 것을.
아이를 카우면서 내가 다시 태어나던 과정이, 부모의 길이었다.
속이 타들어 가던 순간에 내가 할수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다.
부모가 된다는 것.
1%의 가능성만 발견해도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는 끝까지 포기할수 없는 마음.
이제 예지가 기적을 보여 주겠다고 선언을 했으니
온천하에 공표하여 쐐기를 박아 두어야겠다.^^
대한민국 고2 예지...그동안 너무나 성적이 떨어져서
스스로 어디서부터 공부를 해야할지 막막하단다.
그래도 나는 말한다.일년이면 해낼수가 있어.해보자~가보자~
이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만 해도 이미 절반은 시작한거란다.
이제부터 예지가 보여줄 그 기적을 생각하면
엄마는 아무리 힘든 순간이 와도 이겨 낼 수가 있단다.
우리 예지 화이팅~~~
엄마의 응원도 메가톤급인거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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