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 다른 개체가 만나서 한 지붕 아래서 수십년을 살아낸다는 것, 수행이다.
결혼이라는 의식을 거치고 아이들을 낳고
기쁠때나 슬플때나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겠다고 지인들앞에서 맹세를 하고
한결같이 깨소금 볶으며 잘 살아낸다는 것은
세상 모를 때 꿈꾸던 동화속 이야기일 것이다.
결혼은 현실이고,견뎌내고,이겨나가야 할 요소가 많아서
독립적인 개체로 살때의 자기성을 버리고
상대를 배려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수반되어야 한다.
열렬한 사랑을 하여서 한 결혼은 아니라하여도
서른 둘 여자가 선택한 삶에 후회하지않기 위해서라도 나름 열심히 살아왔었다.
나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개체.한 남자를 남편으로 받들고(^^) 살아온 것이 20년을 채웠다.
서른 둘 되던 해 2월 23일이었다.당시로는 꽤 늦은 결혼이었다.
10년은 뒤를,옆을 돌아볼 새도 없이 정신없이 살았다.
생산력은 왕성하여서 서른 둘 십이월,서른 넷,서른여덟에
재왕절개로 세아이를 낳았다.
당시만 하여도 세아이를 낳는 가정이 흔하지도 않았고,권장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더구나 딸만 셋 낳은 사람은 대다수가 아들을 하나 더 낳으려다가 실패하여
딸을 낳은것으로 간주되는 시선이 많아서 세 딸을 올망 졸망 데리고
외출이라도 하면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외출도 하기 꺼려졌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나서 학부형이 되어 학교에 가 보니
나보다 더 무식한(^^) 네아이의 엄마가 있어서 위안을 받은 기억이 난다.
경제적으로 유복하고 고학력의 엄마들은 오히려 다산을 하지 않고
저 형편에 어찌할려고 아이들을 저리 많이 낳아서...
하는 측은지심을 일게하는 가정에서 다둥이 엄마들이 많았다.(나를 비롯하여)
우리 엄마들 세대에서나 볼 수 있던 삶을 살아내는
무지한 여자로 비춰지던,그런 시선이 지배적이었다,불과 20년 전만해도.
그때나 지금이나 비교적 내 삶에 내가 주체이고자하는 의식이 강했던 나는
그런 시선에 굴하지 않고(^^) 세딸의 엄마가 된것에 스스로 행복하고자 집중했었다.
내게로 온 아이들이니 행복하게 해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봉건적 잔재가 나도 모르게 학습되어선지 남편에 대한 마음도 그랬던 것 같다.
나를 만난 가족들이 행복해지길 바래서 아내로,주부로,엄마로 열심히 살았었다.
나는 잊은,그 세월이 20년이 되었다.
유년의 시절이나 청년의 시기에는 부모슬하에서 자랐으니
내 삶의 온전한 주체는 아니었지만 결혼하여 산 세월은 오로지 내 몫의 삶이었다.
잘사는 것도 못 사는 것도 내탓이고 내하기 나름인,내가 주체인 삶.
지내고보니, 20년 세월이 순식간에 흘러 버린 것 같지만
산 넘고 물건너, 공중곡예를 하며 산 시간들이었다.
10년은 아이들 키우느라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산 세월이었고
막내가 초등에 들어가면서 제주도로 발령난 남편은 멀지않아 명퇴를 예고했기에
명퇴 후 어떻게 살지로 머리 터지게 고심하고 명퇴후에는 제 2의 인생길에 들어서서
세월이 어찌 가는지도 모르는 사이...내 머리는 반백이 되었다.
.
자본금 이천만원(^^) 부채 칠백만원 옥탑방 전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었다.
기댈 언덕이 없으니 알뜰 궁상(^^)을 떨며,내핍을 생활화 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셋이라 육아때문에 맞벌이를 하기도 어려워서 남편 혼자버는 것으로
가계를 꾸려가자니 수퍼 울트라 캡숑 졸라맨으로 살아냈다.
이년마다 한번씩 아싯짐을 쌌다 풀었다하며 ...
아이들 예능 교육은 방과후 수업으로...학원이나 과외는 우리집 사전에는 없다하며 살았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피아노, 플룻, 바이올린, 미술등 예능교육을 맛뵈기 해주었다.
아이들 감성은 엄마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으니
늘 화초를 키우던 내 정서와 미술적인 자극을 주려고 노력하였었다.
독서와 화초들과 미술은 우리 아이들의 정서를 촉촉하고 선하게 배경을 깔아 주었다.
영세민 생활비로 살아냈어도 미래를 위해 내핍하고 있었기에
흥부네 집은 <늘푸른 세자매네 집>이었었다.
우리 집에서는 새물건을 찾기가 힘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헌옷과, 싫증나서 버리는 가전품들을 구할 수가 있었고
길 지나다가도 잘 살펴보면 쓸만한 물건을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월급의 절반정도는 늘 저축했었고, 덕분에 결혼 몇년만에 허름하고 낡은 17평 빌라인 내집을 마련했었다.
두평정도 마당이 딸린 1층 빌라인지라 내 텃밭 가꾸기 농부수업은 그때부터 본격 시작 되었었다.
두번의 이사를 더 거쳐서 결혼 10년만에 30년 된 낡은 구옥인 마당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었다.
이곳 제주도로 내려오기 전 스물다섯평의 마당이 딸린 집에서 온갖 원풀이를 하였었다.
시멘트로 뒤덮인 마당을 정으로 다 깨서 산에서 흙을 퍼다 붓고
온갖 꽃나무를 심고 화분에다가 배추도 고추도,상추도 가지도 심었었다.
도심속의 시골집을 재현하며 내안의 끼를 발산한지 2년이 지나고
제주도로 발령이 나버려서 2004년 5월 나는 제주도로 이사를 왔다.
막내가 초등 1학년, 둘째는 4학년, 큰 아이는 6학년...
대부분 직장 동료들은 아이들때문에 남자 혼자서 잠깐 왔다가 돌아가는 여정을 택했지만
이미 회사에서는 사오정명퇴가 기정 사실화되는 시점이라서
나는 퇴직전에 제주도 살이를 해보고 싶어서 고심할 필요도 없이 온가족을 다 이끌고 이사를 했다.
제주도 이사 온 이듬해 1월(2005년 1월) 나는 전세금으로 주저없이 귤밭을 샀다.
막연히 귀농을 꿈꾸기는 했어도 아이들 교육이나 농사로 생계를 꾸리는 일이 막연하여
구체적인 귀농결심은 하지 못하였는데 이곳 서귀포에 와보니
전원과 도시가 한곳에 있어 아이들 교육에도 지장이 없을 것 같고
무엇보다도 너무나 아름답고 따뜻한 서귀포가 꽃을 좋아하는 내겐 환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나는 덜컥, 귤농부가 되었지만
<무식한 자, 용감하다>를 온 몸으로 실천하며 지금까지 돌진해 왔다.
제주도 오기전에는 귤을 먹어만 봤지, 귤나무가 어찌 생겼는지도 몰랐고
농사라고는 더더욱 문외한이었지만 누구는 날때부터 농부였었나 하며...
그때부터 귀동냥으로 무작정 농사를 지었지만
내 안의 식물과 꽃에대한 남다른 애정이 깔려 있어서 몸은 곤해도 늘 행복 할 수가 있었다.
오래전서부터 나는 식물과 꽃과 소통하며, 건조하지않게 달래왔었기에
농부는 내게 딱 맞는 궁합이었지만 농사로 세아이를 키워낼 수 있을지가 고심이었었다.
농사로 세 아이 양육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서는 것이 그후 7년이 지난 올해이다.
머릿속으로 계산하던 것과는 달리 여러갈래의 방도가 생긴터이기도 하고
이제사 농부로 자리매김한 것 같기도 하여서이다.
그렇게...20년이 훌쩍 지나서 올해 2월 23일이 20주년 결혼 기념일이었다.
미운정 고운정 지지고 볶고, 살아 왔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잘 살아낸 것 같아서
우리 가족들에게 상을 주려고 궁리를 해보았다.
어제나 오늘이나 다같은 날이지만 그래도 의미를 부여하여 자축하고
내가 선 자리를 점검해보며 , 기념을 해봐, 말어...하며 며칠을 머리를 굴렸었다.
2006년이었던가? 결혼 기념일날 기념한답시고 제주도 일주 나섰다가
황천행 직행열차를 탈뻔했던 아찔한 기억이 떠올라서 남편 믿고
운전대 맡기기는 불안하여 트럭 타고 전국일주 해보자던 꿈은 접기로 하였다.
http://blog.daum.net/yeainmam/6228350(그때 이야기는 지금도 아찔)
남들 다 해보는 해외여행을 우리도 한번 해봐?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10년을 한가족으로 살아온 우리집 얼룩이(바둑이)는 어데 맡기지?
더구나 우리 얼룩이는 집안에만 산데다가 워낙 낯가림이 심하여
다른 사람에게 조금도 곁을 주지않아서 고심이었다.
이런 저런거 다 따지다가는 어느 세월에 우리도 해외구경 한번 해보나싶어서
땡빚을 내서라도 기념일 빙자하여 <우리도 간다~>하며
인류문명 발상지나 중세 문화유적들을 답사하고픈 맘이 구름같이 일었다.
제주도 와서는 온가족이 다함께 여행을 한 적이 없어서
가족이 다 모였을 때(아이들이 다 크고나면 이것도 쉽지않을것 같아서) 큰 맘 먹고
여행을 해보리라던 맘이...이런 저런 이유로 희석되기 시작했다.
여행도 해본 사람이 하고, 노는 것도 놀아본 사람이 한다고
슬그머니 여행도 귀찮아지고,이런 저런 이벤트도 심드렁해지더니
그냥 맛있는 거 먹고 아이들과 영화나 한편 보자로 귀결됐다.
그 정도는 평소에도 할 수 있는 일인데
거국적인 20주년 기념일을 그리 허접하게 보내야 되나? 싶은 생각이 혼란케 했지만
아직 피로가 다 가시지 않은 내 몸은 여행도 몸이 따라줄 때 하는 것이지
아직은 쉬고만 싶어서 설산 한라산이 유혹해도 쳐다만 보는 처지라
아이들에게 어디가서 맛난 것 먹고 영화 한편 보는 것으로 기념일을 자축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모모뷔페로 향했다.
골고루 골라먹는 재미를 만끽 하려고...
처음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역시 잘 왔어~하며
허겁지겁...한번에 세접시씩 온갖 음식을 다 맛보며 좋아라 하다가
슬슬...후회되는~ 뱃속이 이상해.
화학조미료 잔뜩 든 음식들이 속을 마구 요동치게 한다.
한가지라도 제대로 맛있는 곳으로 갈걸...하는 후회감이 밀물처럼 밀려오는데...
그래도 오랫만에 온가족이 외식을 했다는 것으로 족하다고 위안하며...
나는 집에 돌아와서 김치와 청국장찌게로 느글거리는 속을 달랬다.
당신 전직 호텔 요리사 맞어?
생전 뷔페 처음 먹는 사람처럼 말이야~
남편이 눈을 흘기던 말든...
대한민국 아줌마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뷔페는 삼일치는 먹어줘야 본전을 빼쥐~하며...
한번에 세접시를 세번씩...본전빼자며...
접시가 기가 막혀~
그리고도 디저트를 식사량만큼이나 먹고도
웬지 허전해~를 연발하며...
언제나 뷔페 먹은 후에 찾아오는 공복감,
결혼20주년 기념물들, 세자매
사진 찍히기싫어하며 고개를 꼬고 앉은 아이들.
뷔페식당을 나와서 영화 <댄싱퀸>을 보러 가기로 하였는데
시간이 남아서 근처 호텔에서 산보를 하며 사진을 찍었다.
으흐흐 헉~~~결혼 20년만에 고릴라 공룡 부부가 되었다.
뷔페 처리하는 정신은 잘 살아내는데도 일조했지만
하마아지매로 체중이 요지부동하게 하는데도 일조를.
늘 내 배는 음식물처리기 구실을 자처하였으니...
아~다시는 돌아가지못할 코스모스시절이여~
남는게 사진밖에 없는데...
예슬이와 아빠는 추억을 만들며...
<신 춘향뎐> 촬영중입니다요.^^
예슬아~ 날아 올라라, 하늘 높이 날아라~
너의 꿈을 그렇게 펼쳐라~
스무살 청춘...엄마는 너무도 부러운 나이이다.
어디서나 핸드폰 삼매경...
기계에 노예가 되었다고 에미는 통탄을 하건만...
그 사이 세월동안 막내 예인이도 이제는 엄마 키를 훌쩍 넘어섰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터널을 막 지나고 있는 아기공룡 예지는?
고3되는 올해는 공부에 전념했으면 좋으련만...
이제는 지구별로 돌아와 제자리를 빨리 찾아주기를~
<시크릿 가든> 촬영 화보 옆에서
예슬이는 현빈 얼굴에 기대어 서서...
사랑을 꿈꾸는 예슬이...참 좋을 때다.
산책을 뒤로하고 우리는 <댄싱퀸>영화를 보았다.
여기저기서 검색해보니 감동의 도가니라고 해서...
뷔페먹고 울렁 거리던 속이 댄싱퀸 보고나서 확 풀려 버렸다.
간만에 온 가족이 함께 한 영화중에서
마음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내용이야 다들 검색하면 아실 터이니...
느낌만 전하면 ,엄정화의 꿈을 향한 열정, 건강한 몸과 춤은 영화를 신나는 축제로 몰아 넣었고
황 정민의 표정연기는 압권이었다.
꿈과 감동과 재미를 동시에 주는 영화였다.
한편의 좋은 영화는 해외여행을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마저 날려 버렸다.^^
그 사이 우리들은 <도가니>, <세 얼간이>,<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등
다수의 명품 영화들을 컴퓨터로 다운 받아서 TV화면으로 보면서
치킨시켜 먹으며 온가족이 함께하는 행복을 만끽 하였다.
몸의 휴식과 마음의 휴식을 이렇게 풀어내며 나는 내 삶을 들여다 보고 반추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해외(제주도)에 살고 있으니
굳이 해외여행 못가도 억울할 것은 없지만
앞으로 여유가 되면 세계문화유산을 아이들과 두루 섭렵하고픈 소망을 간직하고...
결혼 20주년은 뷔페와 영화 한편,그것으로도 충분히 충만하였다.
평범한 내 인생도 돌아보니 흥미진진 한편의 드라마같다
앞으로 이십년도 콩 볶으며 잘 살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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