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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아들로 태어난 남동생에게...■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58)
농촌여성신문 | webmaster@rw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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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2.18 10: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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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체절명의 순간이 돼서야 스스로를 구출할 힘이 나오는 법. 어둠의 긴 터널을 지나니 밝음이 더 환하게 느껴지네..." 무거운 짐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이제야 들어서 애틋한 마음에 편지를 써보네. 엄마의 넷째 딸로 태어난 내가 4년 후 남동생을 보고나서야 사람대접을 받아서, 태생적으로 나는 자네와는 경쟁적인 남매간이었던 것 같아. 금지옥엽의 귀한 아들이 태어나자 엄마는 그제야 허리를 폈고, 종손집 맏며느리의 체면을 살리게 됐었지. 자네는 몸에 좋다는 것은 다 해 먹여도 잔병치레가 많아서 엄마의 애간장을 녹이게 했었지. 소아마비도 살짝 지나가서 어릴 때는 별로 표가 안 나더니 중년을 지나면서 건강이 나빠지고 이제는 다리근육이 마비돼 목발을 짚고 다니고, 부축해줘야 할 정도로 보행이 어려워져서 안타깝기 그지없네. 아버지 사업이 실패해서 가세가 크게 기울었지만 집안의 장손이었던 자네는 무풍지대라고 할 수 있었지. 집안 모두가 자네를 도우라는 특명이 내려져서 자네는 알바를 한 번도 안하고 대학을 다닐 수 있었지. 법대를 갔던 자네가 고시를 패스하면 가문의 영광도 부활하리라는 한줄기 희망을 부모님은 갖고 계셨던 것 같아. 가문의 흥망성쇠를 운명적으로 짊어져야 했던 외동아들의 무거운 짐을 나는 젊은 날에는 가늠할 수 없었네. 자네가 고시도 포기하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그것도 포기하고 일찍이 사업에 뛰어들어 초전박살이 나는 운명을 맞이했을 때조차도, 철없는 외동아들이 허욕을 부려서 곤경에 처했다고만 생각했었지. 선비 같던 아버지가 어울리지 않게 사업을 하여 실패했듯이, 자네도 학자의 길을 갔어야 할 사람이 웬 사업이란 말인가? 사회는 곧 전쟁터인데,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자네가 어찌 감당했겠나. 실패를 딛고 일어서려고 벌인 일이 더욱더 꼬여서 재기불능의 상태로까지 돼 자네는 개인파산자로 도피신세가 됐었지. 가정조차 건사하지 못할 신세가 된 자네가 겪은 고통을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사채업자에게 끌려가서 장기매매 각서까지 써야했던 절박한 상황까지 겪고 나서 자네는 다시 태어난 거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을 때, 절체절명의 순간이 돼서야 스스로를 구출할 힘이 나오는 법. 자네는 드디어 홀로 재기할 힘이 생긴 것 같았네. 어울리지 않는 사업을 하지 말고 학문의 길로 가라고 누나들이 조언했고, 자네는 40세가 넘어서야 다시 공부를 하여 박사학위를 따고, 교수라는 직함도 달았네. 삶의 극한 상황을 이겨내고 재기를 한 것이라서 기립박수를 보내네. 목발을 짚고도 종횡무진하는 모습이 장하고 기특하네. 이제 사람의 향기를 가득 채워서, 남은 삶 아름답게 영위하시게. 외동아들로 태어나서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는 중압감도 내려놓으시게. 어둠의 긴 터널을 지나오고 나니 밝음이 더 환하게 느껴지네. 우리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이 빚뿐인 줄 알았었는데, 좌절하지 않는 강한 정신력과 공명한 도덕심과 영롱한 자존감이 더 가치 있는 유산이었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네. 조부모님, 부모님이 정신을 갈고 닦으시던, 오래된 책의 먼지를 닦으면서 정신유산의 의미를 되새겨 보네. 이제 부모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안도하실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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