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딸들아~■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57)
농촌여성신문 | webmaster@rwn.co.kr
|
||
승인 2022.02.11 08:40:25 |
딸들아~!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더니...
딸들아~ 우리가 주인공인
세상이 왔구나~~~
60년 전 나의 엄마는 네 번째 딸을 낳고, 죄의식에 몸조리도 못하시고 바로 일어나서 일을 하셨다고 한다.
그 넷째 딸이 30년 전 첫째 딸을 낳았고, 2년 후 또 딸을 낳았고,
4년 후 원치 않았던 딸을 또 낳아서 세 자매의 엄마가 됐다.
셋째 딸은 계획에 없이 들어섰는데, 초음파로 아기를 보던 의사가 “예쁘게 생겼네~” 해서 또 딸임을 직감했었다.
‘두 딸이 있는데 또 딸을 낳아야 하나...’ 하는 갈등이 생겼지만
천주교 영세를 받기 위해 교리 공부 중에 있어서 ‘낙태는 죄’라는 말에
내게로 온 아이를 잘 키우라는 신의 배려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낳았다.
내게도 무의식중에 아들 하나 낳았으면 하는 맘이 있었는지,
잠깐 마음이 뻐근했지만 이내 마음을 추슬렀다.
세상 모르는 아기가 한없이 순하고 방긋방긋 웃으니,
“이 아이 안 낳았으면 어쩔 뻔 했노~” 하고 잠깐이라도 서운했던 내 마음을 반성했다.
이런 나와는 달리 남편은 미련을 가지는 말을 시시때때로 했는데,
친정 엄마는 “이서방 보기 미안하다”며 사위 앞에서 죄인처럼 굴었다.
아들 하나 점지해 달라고 태백산 신령님께 치성 드리고 태어난 인물이 나 아니던가?
또 딸이어서 낙심을 한 엄마가 젖도 물리지 못하고 윗목에 돌려놓고,
남편과 어른들께 죄인처럼 굴게 했던 엄마의 천추의 한이 된 장본인이었던, 딸, 나!
“딸만 낳은 게 왜 엄마의 죄란 말인가?”
“내가 딸만 낳았다고 왜 엄마는 사위 앞에서 미안해 하는가?”
세 아이를 조롱조롱 앞세우고 시장이라도 가게 되면, 측은해 하는 눈초리들.
딸만 낳은 나는 그 자체만으로 불쌍한 존재가 됐었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시부모님께 받은 홀대는 없었지만,
손위 형님은 “아들 없어서 어쩌냐...”는 식의 말로 찔렀다.
이런 주변 환경이 나로 하여금, 내 딸들에 대한 보호본능이 더 강해지게 했다.
“딸, 여자... 가 아니고 한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한다.
내 아이들은 결코 딸이라고 설움 받게 하지 않을 거야...” 하는 모성애로 무장했다.
나는 딸들을 키우면서 ‘딸이어서’ ‘여자라서’라는 제한을 두지 않고 키워도 되는 세상을 만나게 됐다.
딸로 태어나서 겪었던 2대에 걸친 수모가 이제는 끝나는 세상이 도래했다.
천지가 개벽하게 돼 지금은 딸만 있는 내가 부럽다고 말하는 세상이 됐다.
딸만 셋 있는 나는 심지어 금메달이고,
아들만 셋 있는 엄마는 목메달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니 이런 격세지감이 있나 싶다.
나만해도, 나답게 살겠다고 주장을 해도 되는 세상을 만났으니
태백산 신령님께 감사한다. 물론 하느님께도...
내 노후는 아들만 있는 엄마보다는 다채로울 것 같다.
딸들 때문에 젊은 감각을 공유할 수 있어서 꼰대노인을 면할 수 있을 것 같다.(남편은 꼰대스러워~^^)
함께 일하면서 신나는 음악을 틀고, 춤도 추고, 노래도 하며 일을 하니 생기발랄해지고,
명랑해지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유치해지기도 한다.
싸이의 ‘챔피언’, 노라조의 ‘고등어’ ‘판매왕’ ‘수퍼맨’ 등을 부르니 20대처럼 흥분되기도 한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더니...
딸들아~ 우리가 주인공이 되는 세상이 왔구나~
감개무량하다! 신나게 살자!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농촌여성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
**********************************************************************************************************
설 날 에
50년 전 설날 아침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본다.
임금님 수라상보다도 더 풍성한 차례상.
飯西羹東 (반서갱동),어동육서(魚東肉西) 두동미서(頭東尾西),삼 탕,
좌포우혜(左脯右醯), 조율이시(棗栗梨枾), 홍동백서(紅東白西)로 차린
상다리가 휘어지는 제사상을 준비하느라,
몇날 며칠 허리가 새우등처럼 휜 여자들과는 달리,
한복으로 차려입은 남자들은 손님맞이 하느라
까치설날부터 거나하게 한잔하며 남자들끼리 화목을 도모 하였다.
어린 내 눈에는 부엌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종종 걸음 치는 여자들과는 달리
신선처럼 즐기는 남자들을 보며 “나는 결코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 하며
도리질을 했었다. 일찍부터 부엌살림을 배워야 한다며
음식 만들기를 도우라해도 나는 설거지물을 손톱으로 튕기며,
일부러 살림살이를 배우지 않고 도외시 하였다.
남존여비 사상의 불평등이 어린 내 눈에 너무나 불합리해 보였다.
코를 하늘로 들고 콧방귀를 뀌는 나를 보고, 작은 엄마는 혀를 찼다.
(엄마는 막내딸이 공부는 잘하니, 공부하여 자기처럼 살지 말라했건만)
작은 엄마가 뭐라고 내 인생에 간섭을 한단 말인가 하며
속으로 도끼눈을 치켜떴다.
그랬던 내가, 아부지 사업이 크게 실패하여 가세가 기울어서,
스스로 자립하여 홀로서기해야 하는 운명에 놓이자~
초년에 안한 고생을 한꺼번에 몰아서 하게 되었다.
밥 한번 안해 본 내가 생뚱맞게 “요리는 예술이다”는 말에 현혹되어
예술하고 싶어서 요리학교에 가서 요리사가 되었다.
요리가 예술이 되기까지는 적어도 10년은 밑바닥을 다져야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현장에 투입되고 나서였다.
요리 초년병은 3년은 그릇을 씻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는 조직에서
나는 뒤늦게 쌍코피가 터지게 일을 하게 되었다.
결코 안하겠다던 부엌일을 직업으로 삼다니...
“뒤늦게 전공까지 했는데 돌아갈 순 없잖아~”
힘든 노동을 이겨내기 위해 스모선수처럼 몸을 키우고,
내 손은 엄마의 부엌일과는 비교가 안 되게 물마를 날이 없게 되었다.
인생 총량의 법칙이 적용 되어 초년에 안한 일,
중년에 몰아서 다하는 운명이 되었다.
육아 때문에 요리사의 길을 접고 나서, 다시 선택한 농부의 길은
나의 가당찮은 오만을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게 하였다.
꽃을 좋아하는 내가 귤나무가 꽃나무로 보여서 덜컥 귤농부가 되고나서
겪었던 몸 고생(^^)은 겸손이 힘든 나를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온갖 우여곡절을 지나오고 나니 ... 이제사 인생이 보인다.
어릴 적, 그토록 혐오(^^)하던 부엌데기 여자의 삶을
이제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엄마의 헌신이 있어서 가족이 지켜졌고, 어려움 중에도 사랑이 마르지 않았었다.
이제 내가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고,
내 역할은 밑거름이 되어 주어야 하는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큰 집에서 추석만 제사를 지내겠다고 하여서,
올해는 흩어져있던 아이들이 집으로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에게 명절 분위기를 내려고 나도
옛날 엄마가 하던 것처럼 음식 준비를 했다.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환갑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갖가지 전을 만들면서, 한잔 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그 옛날 엄마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농촌여성신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한 바람 (0) | 2022.02.26 |
---|---|
외동아들로 태어난 남동생에게 (0) | 2022.02.20 |
꼰대엄마가 MZ세대 딸들에게 (0) | 2022.01.09 |
말 한마디, 귤편지 (0) | 2021.12.26 |
투혼 (0) | 2021.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