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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성신문

결혼기념일

by 농부김영란 2022. 3. 5.
라이프
결혼기념일■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60)
농촌여성신문  |  webmaster@rwn.co.kr
승인 2022.03.04  10:50:03


"인생사에 잊지 못할 결혼...
한 남자와 30년을 사는 것이 
도를 닦는 일이라는 것을 
진갑의 나이에 깨닫는다."






 
내 인생에 가장 큰 획기적인 일은, 바로 결혼한 것이었다.
운명을 바꾸거나 심각한 영향을 끼친 사건인데,
전혀 다른 성향의 남자와 만나서 덜컥 결혼한 일이었다.
덜컥! 32살의 과년한 여자가 심사숙고도 없이 덜컥 결혼하다니...

30년 전, 1992년 2월 23일, 내 인생사에 잊지 못할 결혼.
한 남자와 30년을 살아내는 것이 도를 닦아서 사리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진갑의 나이가 돼 깨닫는다.
결혼 30년이 된 나(자뻑교주), 40년이 된 유리공주, 50년을 보낸 마중물언니.
겸손은 힘들어 팀은 만나면 아직도 해탈하지 못하고
결혼서약서에 도장을 찍은 우리들 손가락을 원망한다.

겉보기에는 모두 현모양처에 준하는 사람들이다.
자식들 잘 낳아서, 성장시키고, 남편과도 아웅다웅하지만
무사히 가정을 지키며, 현모양처 반열에 등극할 정도로 내조를 잘하며 산 사람들이다.  

우리는 쌓이는 울분(남편으로 인해)을 만나면 입으로 풀어내며,
컴백 홈 할 때는 다시 현모양처로 돌아가서 지아비를 섬기는 대한민국 아내들이었다.
이제 돌싱(사별로 돌아온 싱글)이 된 마중물언니는 애틋한 그리움과 반성까지 내비친다.

옆지기 살아계실 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어서 “있을 때 잘해”인가요? 하며 발칙한 아우가 농을 던지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여서 곰삭은 잘 익은 김치 맛이 된 부부의 정은
오묘한 사랑의 다른 형태라는 것을.

노화현상인지 말랑해지고 있는 남편이 30주년 결혼기념일에 무엇을 하면 좋은지 물어온다.
‘30년 만에 처음 듣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하며 멀뚱히 쳐다보았다.
“여행을 갈까?” “호텔뷔페를 갈까?” “꽃다발을 살까?”
일 하면서 내내 생각해도 확 잡아당기는 게 없다고 결정장애를 토로했다.
내가 그토록 기념일을 챙기고 싶을 때는 먼 산 바라보듯 하더니,
김빠진 이제 와서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로 들린다. 맘이 심드렁했다. 

하지만 “이런 갸륵한 생각을 하다니...”하며 반겨줘야 가정의 평화가 유지된다는 것을 아는 나는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를 쳤다.(득도해 경지에 이름~)
“좀 생각해 봅시다” 하고 뜰을 살피다가 보니,
좀 전에 남편이 귤나무 소독을 하느라고 호스 줄을 끌고 가다가
내가 꽃씨를 묻어둔 화분이랑 어린 묘목이 심겨진 화분들을 다 엎어서,
씨앗과 뿌리가 드러나 나뒹굴고 있었다. 

순간 욱~하고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30년을 살고도 마누라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도 모르고 헛다리를 긁고 있다니~’
꽃다발을 생각하는 그가 기가 막혔다.
그는 결혼기념일 이벤트에 골몰해서 내가 애지중지하는 화분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나보다.
늘 엇박자를 치는 평행선 부부는 측은지심의 정으로 살아온 것 같다.

“결혼기념일에 일주일간 나 혼자 여행 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꿀꺽 삼키고, 
비싸다고 선뜻 사지 못했던 딸기 한 상자를 사서 “딸기처럼 맛있게 삽시다” 하며 남편과 딸기를 먹었다.
밤새 딸기를 그리면서, 시행착오투성이의 결혼생활을 반추했다. 

딸들아, 그래도 결혼해서 끝까지 해로하는 게 성숙한 삶이라고 말해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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