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매네 반디농장 둘째 예지는
올해 스무살 대학 1학년입니다.
제주도 올때는 모두 초등생이었던 세아이가
이제는 둘이 대학생이고 막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거치면서
가지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것을...
저는 예지를 통해 절감해야 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량아로 태어났던 예지는
사춘기를 맞으며 에너지가 다른 사람의 몇배이다보니
제가 보기에는 걸어다니는 태풍이요 활화산이었습니다.
중 2서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돌아보니 고개가 절래절래~~~
하루가 멀다하고 투닥거린 것 같아요.
(옆집 보기가 심히 민망함 ^^)
그 예지 이야기를 전편에 예지의 입학식에서 어느 정도 이야기 했었는데
이번에는 그랬던 예지 인간 만들기 프로젝트를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전편 예지의 특별한 입학식 이야기 http://blog.daum.net/yeainmam/13727345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나라 정책에 부응한
대한민국 착한 국민들이 너도 나도 둘만 낳다가
그것도 많아서 "딸 아들 구별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로 구호가 변하던 시절.
저는 왕무식하게 아이를 셋이나 배를 가르고 꺼내는
무모함을 저질렀습니다.^^
그것도 남아 선호사상이 극심한 대한민국에서
딸셋을 낳았을 때 내게로 쏟아지던 무수한 연민의 눈초리를
애써 의연하게 외면하며 씩씩하게 살아온 장본인입니다.
친정엄마조차 딸만 셋 낳은 막내딸이 면구하여
사위보기 미안하다며 무슨 죄인처럼 기죽어하던...그런 시절도 있었는데
그게 모두 내가 동시에 다 겪고 있는 시대 변화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여자가 대통령을 하는 시대에다가
딸 셋 낳은 저는 애국자 반열에 들며
딸 많아서 부럽다는 찬사까지 받는 시절이 올 줄
그 누구 알았겠습니까? 하하하...
친정집에서 네째딸로 자라며 은근히 받았던
남아선호 사상에 반발하여
나는 절대로 딸들에게 "여자가 뭘~" "여자라고 하면 안돼~"등등의
표현은 절대 안하리라던 다짐이 있었었지요.
종손집 맏며느리였던 엄마가 딸만 내리 셋 낳고
네번째는 태백산 신령님께 아들 하나 점지해 달라고 백일 기도해서 낳은 아이가
아들이 아닌 딸, 바로 저였습니다.
그 태백산 신령스러운 기운을 받고 태어나서인지
저는 불굴의 투사처럼...어떤 상황에서도 기 죽지않고
오뚜기처럼 살아올 수 있었던 기백이 된 듯 합니다.ㅎㅎㅎ...
어릴때 제 무용담을 큰 언니가 전해 주는데
떼를 쓰면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고...
친정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엄마 따라 가겠다고
동구밖까지 앙종불종 울면서 굴러 갔는데
그 거리가 족히 몇백미터는 되어 온 동네 소문이 다 났다 합니다.
누구네집 막내딸 성질 대단하다구요~
(에궁, 난 그런 기억 안나는디...ㅎㅎ..)
그런 에미한테서 그 보다 더한 인간을 태어나게 해주셔서
어미교육 톡톡히 시켜주신 하느님의 섭리를 이제사 깨닫습니다.
예지는 여자아이임에도 태어날때부터 기골이 장대하여
이 놈 잘 키우면 한 몫 하겠네~하는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놈이었습니다.
욕심이 드글드글 용광로처럼 끓어서 먹는 것도
언니동생 합한 것보다도 더 많이 먹고
뭐든 혼자서 다 가지고 싶어서 떼를 쓰곤 했지요.
욕심 많은 아이를 감당을 못해서
자꾸만 아이에게 절제를 심어 주려던 에미 교육방침이
오히려 부작용으로 나타나서
먹는 것으로 아이가 욕구불만을 풀어내기 시작하면서
저와 예지와의 줄다리기는 시작 되었습니다.
순간 순간...저는 잘 이끌어 보겠다고 나름 생각하면서 키우려고 했지만
예지에게는 저의 방식이 잘 먹히지를 않고
오히려 물욕과 식욕을 절제시키려던 부작용이 속출하여
사춘기에 접어들자 그동안 아이가 쌓아둔 욕구불만이
장마철에 소양강댐 물 방출하듯 하였습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말 그대로였습니다.
회오리 돌풍이었고, 활화산이었고,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고삐를 죄어도 보고,어퍼컷으로 날려 보기도 하고
말로서 회유를 해보기도 하고...
소용 없었습니다.
막무가내, 귀머거리가 따로 없었습니다.
날뛰는 야생 코뿔소처럼 도무지 어떻게 통제를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고삐를 묶어서 안전하게 끌고 가 보겠다는 엄마의 열망을 코웃음치고
예지는 자기만의 행성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소통금지" 팻말을 크게 내걸었습니다.
예지와 부딫힌 수많은 이야기들을 일일이 다 열거 할 수도 없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큰소리가 절로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떨어지는 성적을 걱정했으나
갈수록 멀어져가는 부모 자식간의 거리가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에미인 저는 그래도 엄마 마음에
돌아서면 아이 걱정에 매번 나를 반성하고
어떻게하면 아이를 바로 잡아서 이끌어 갈 수 있을까를 고심했지만
아빠와 부딯히고 난 후는 아이나 아빠나 둘 다 휘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이러다가는 부모 자식간에 원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면서 저는 부모인 저를 자꾸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내 관점에서가 아니고 아이 관점에서 생각해보기로...
성적 떨어져도 괜찮아~~
일등은 일등대로의 삶이 있고 꼴찌는 꼴찌대로의 몫이 있는 것,
사회에서는 공부 꼴찌 했다고 인생도 꼴찌 하는 것은 아니더라...
멀리만 안가면 된다~
돌아올 수 없는 강만 건너지 않으면
마음대로 뛰어놀게 멀리서 지켜 봐야지~
잘 먹고 잘 노는 것도 복이다~
컴퓨터에 미쳐서 밤을 지새우는 것도
언젠가는 지쳐서 못 할 날이 오겠지~~
엄마 아빠와 아예 담 쌓고 이야기를 안하려고 하지만
지가 필요하면 말 걸겠지~
폭탄 맞은 것 같은 방도 지가 거슬리면 치우겠지~
방은 그렇게 해놓고 그래도 멋은 부린다꼬
아침마다 난장판으로 늘어놓고 멋을 부리는 것도
한때라고 봐주자~
꼬질하게 하고 다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 해야지~
수능치자마자 샛노란 머리 물들이고 오던날
세상 만방에 "나는 날라리"라고 몸으로 말하고 다니냐며
어이상실 했건만...그것도 한 때라고 봐주자~
어디가서 남을 괴롭힌 것도 아니고
지 몸에다가 지가 하는 것을 눈꼴시러워도 안 쳐다보면 된다~
눈을 찢어서 쌍커풀을 만들고 귓구멍을 뚫어서
아프리카원주민처럼 주렁주렁 귀고리 코거리를 하든말든
내 알바 아니다고 절대 말 안 할 수 없는 관계
"너는 죽는 날 까지 내 딸이다"며
온 몸으로 결사 반대해도
나는 이제 성인이 되었는데 내 맘대로 할테다~하는 딸.
성인 좋아하시네~ 정신 연령은 일곱살이면서
몸만 큰다고 성인인 줄 알아~
톤이 올라가면 나보다 더 톤을 높이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한 에미,
승질 끓는 것을 억누르고
너는 지금이 너무 이뻐, 살만 빼면 미스코리아 진감이 틀림없어~
예지야~ 너는 살 빼는게 급선무야~
어르고 서르고 달래고...
그렇게 예지의 사춘기를 지나 오면서...
여자 김준현, 스모선수를 떠올리게 하는 우리 예지.
그래~ 아프지만 않은 것도 다행이다~
그렇게 마음을 하나하나 내려 놓으면서
비로서 아이와 나와의 관계가
안정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는 인간으로 돌아 오겠지~~~
모든게 다 이 에미 탓이다~~~고
스스로 고해성사하던 시점이 나도 아이도 사춘기가 절정을 지나고
고3 1학기가 다 지나서였지요.
그 모든 것이 다 부모로부터 온 것이 맞다는 생각이 제게 들고부터
저는 예지와의 관계 회복에 온 마음을 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니스프리>에서 예지와 비누 만들기 체험 했습니다.
고3 1학기가 지나고...
아이가 대학교를 가야 하는데
이 성적으로 어느 대학교를 간단 말인가~~~
예지네 학교는 우반과 열반(열등한 열~?) 으로 나누어 있는데
예지는 열반에서 노는 것은 일등(불량 날라리는 아닌),
공부는 자기 하고 싶은 것은 전교일등도 간간히 하고
하기 싫은 과목은 용감하게 전교 꼴찌도 하는 ...
그래서 내신으로 치면 중간정도 되는 성적이었지요.
예지보다 더 못하는 아이들 덕분에 그 정도라도 내신 받았네요.
그래도 그 성적으로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중...
어느날...내 눈에 뜨인 한국농수산 대학교~~~
학교 성적만으로는 갈 수 없는 학교.
부모님 영농 기반과 면접에 비중을 많이 두는 학교라
작은 희망의 끈을 놓지않고 밀어 부쳤던 학교.
하느님은 예지를 사랑하셔서(실제로 예지는 유아영세 받아서
미카엘라라는 천사 영세명을 가지고 있지요)
예지에게 다시 한번의 귀한 기회를 제공해 주셨지요.
예지가 한국농수산대학교에 수시 합격 하던 날...
저는 감사의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철없는 아이는 제 멋대로, 제 맘내키는대로
맘껏 놀면서 제 맘대로 소비하면서 놀면서 살고 싶어하지만
인생 만만치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에미는
아이가 나중에 철 들면 얼마나 후회할지를 뻔히 아는지라
예지의 대학 입학은 저에게 크나큰 선물이었습니다.
나라에서 차세대 영농 후계자를 키우는 학교
한국농수산대학교...
알고보니 정말 좋은 학교였습니다.
천둥벌거숭이 야생마를 반군대같이 규율이 엄한 학교에 넣고나니
내심 걱정이 되어서 예지 달래기 작전으로
낙제만 안 하면 되니까 맘껏 놀아라~ 했더니
정말로 낙제만 간신히 면한 1학기를 보내고 여름방학에 돌아 왔지요.
아슬아슬 조마조마하게 그래도 잘 견디고 돌아온 예지를
저는 금의환향한 것 처럼 맞았습니다.
"장하다~ 우리 예지~~~"
간신히 낙제 면하고 돌아온 아이를 이렇게 맞을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예지의 사춘기를 지나면서 맘고생 많이 한 덕분이었습니다.
몸은 어른으로 컸지만 마음은 턱없이 어린 아이를
잃어버린 5년을 만회해 보력고 저는 궁리중입니다.
한국농수산대학교를 보내놓고 아이에게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자긍심을 일깨우고 호연지기를 불어 넣으려고 애 쓰고 있습니다.
아직은 아이가 뭐가 뭔지도 모르고 학교가 재미 없다느니~합니다만
그래도 1학기를 보내고 돌아온 아이는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부모한테 막무가내 생떼를 쓰며 제멋대로 굴던 아이가
기숙사 단체 생활을 하며 자신의 휘어지고 모난 모습도
어느 정도 바라보게 된 것 같았어요.
입학식때도 아무리 말려도 우기며 샛노란머리를 하고 갔었는데
집에 돌아 올 때는 다시 까만머리로 돌아 왔더라구요.
아무리 내가 말해도 들은 척도 않하고 제 하고싶은대로 하겠다며
조절이 안되던 아이가 제 말에 조금씩 귀를 기울이더라구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제부터라도 휘어진 가지를 바로 세워야겠다며
에미는 작심을 하고 있습니다.
예지가 방학하고 돌아와서 일주일만 쉬게 하고
아빠한테 부탁하여 아빠가 다니던 호텔에 부탁하여
실습요청을 하였습니다.
농산물 2차 가공을 하려면 배워야 한다며
베이커리 실습을 자청했는데
오전근무가 5시10분 셔틀 버스를 타고 가야만 했지요.
그 시간에 버스를 타고 가려니까 4시에 알람시계를 맞추어 놓아야 하구요.
처음에는 하기 싫다던 예지를 감언이설로 녹여서
실습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엄마마음은 무엇을 배우는게 목적이 아니라
인간 만드는게 목적이었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어디 가서 알바를 해서 그 돈으로 실컷 써보는게 소원인데
저는 실습비 못 받아도 사회란 이런 곳이다~
너의 존재가 어떤 지를 파악해야 한다~는게 저의 목적이었지요.
뿔이 사방으로 돋은 아이가 사회생활을 경험하면서
다듬어지기를 바랬던 것이지요.
처음에는 출근은 힘들었어도 베이커리 실습이 신기하기도 하여서
군말없이 출근하는게 너무 기특하여서
퇴근해서 돌아오면 용알처럼 떠받들었습니다.
안봐도 비디오~
실수투성이,허당일 것을 익히 알지만
그런 너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그런데 그것은 엄마맘이고...
사회가 어디 상대방의 단점과 실수를 무한 용서하고
아량을 베푸는 곳인가요?
당연히 얻어 터지겠지요.엄마는 그것도 노렸습니다.
너는 많이 많이 깨어져 봐야 한다~가 엄마가 바래는 바였습니다.
그동안 내가 감당 할 수가 없어서 고삐를 놓아 버렸던 아이라
이대로 사회생활하면 본인도 힘들고 옆에 사람도 힘이 든다가
저의 생각이었거든요.
회사에서 깨어지고 오면 엄마가 집에서 어루만져 주마~
저의 의도대로 원군이 나타나 주었습니다.
바로 위의 상사...예지보다 일년 먼저 들어온 선배가
저의 의도대로 원수같은(^^) 상사역활 담당을 하였지요.
집에 돌아오면 예지는 그 선배한테 지적당한 이야기들이 늘어 갔습니다.
저는 속으로 "내가 너를 안다~안봐도 뻔하구나~
그 선배가 하는 말이 다 맞다~ 그 선배도 속이 터질거다~" 그랬지만
예지 앞에서는 예지 편을 마구 들었습니다.
예지가 원하는대로 맞장구 쳐주었지요.
하지만 마지막에는 신신당부 하였습니다.
절대로 덤비면 안되고, 그게 사회이고, 아빠얼굴 먹칠 하면 안되니까
참고 끝까지 잘 다녀야 한다고.
아빠가 다닌 회사라 아빠 봐서라도 잘해야하며
그래도 너는 대접받는 것이니 그나마 다른 사람보다는 나을거다.며...
몇번이나 울컥하며 바로 위 선배가 힘들게 하고
(자기가 일 못하는 것은 생각 안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가기도 힘들고
하루종일 서 있으니 다리에 쥐가 나고
손이 부어서 쥘수가 없다고...내가 왜 이 개고생을 해야 하냐고
어느날은 와서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한달을 며칠 앞둔 날이었지요.
아빠때문에라도 그동안 다녔는데 이제는 더이상 안다니겠다구요.
사실은 저도 예지가 새벽에 일어나서 출근하는 것만해도
너무나 기특하긴 했습니다.
일 잘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예지가 새벽출근하여 하루종일 버티는 것만해도
예지일생에 최고의 고난이라 견디는 것만해도 대견했지만
일 못하여 선배가 핀잔을 주는 것을 더이상 못 참겠다고
안다니겠다고 엉엉 우는 것을 보니까
더이상 등 떠밀 수가 없었습니다.
궁리끝에 예지실습을 부탁한 제과장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실습을 받아준 것도 아빠를 봐주어서였지만
제가 아이를 실습 보낸 취지를 전했습니다.
일을 배우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전공도 아닌데
오직 인간 만들고 사회를 배우기 위해서라고요.
조직을 배우고, 참는 것도 배우고, 어떻게 사회가 굴러 가는지도
배우게 하려는 의도라고요.
그러니 아예 없는 것이 낫다 싶으면 짤라도 좋지만
그래도 없는것보다는 있는게 도움이 된다면
둘째달에는 첫달보다는 더 잘하지 않겠느냐고요.
예지 바로 위 선배가 예지같은 후배 다루느라
힘들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고요.
그렇지만 예지는 못한다고 마구 핀잔을 주는 것보다는
못해도 잘한다고 칭찬을 하면 훨씬 효과가 크다는 것도 알려 주었지요.
제과장님도 부모라 제 말을 잘 이해해 주시고
기꺼이 저의 원군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지는 실습 두달을 채우고
두달째는 잘 못해도 잘한다는 칭찬과 격려에 고무되어
신이나서 실습 끝나고 일주일 남은 방학을 알바까지 채우고
학교로 돌아 갔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무엇을 할지 진로를 잘 몰랐는데
베이커리가 적성에 맞는다며 은근히 진로를 바꿀 생각까지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목표가 베이커리 취직이 아니기에
넌 농산물 가공으로 진로를 잡아야 한다고 화살표를 넌즈시 그려줍니다.
예지는 한달 실습비 20만원을 받아서
엄마 생일날 운동화를 하나 사주었습니다.
처음에는 호텔 부페를 사 준다고 하는 것을
안그래도 살을 빼야 하는 판에
그 고생한 돈으로 한입에 홀랑 털어 넣는 일은 절대 못한다며 사양하여
메이커 운동화 하나를 선물 받았어요.
브랜드상품에 은근 부정적 견해가 있던 나였는데
브랜드 신발 신어보니 역시 다르긴 다르네요.
가볍고 날아갈 것 같아요.ㅎㅎ...
물론 예지의 피 눈물 나는 실습비로 선물 받아서 더 의미가 깊어서일거예요.
내게 엄마 수업을 톡톡히 시킨 예지가
이렇게 지구별로 귀환중에 있습니다.
엄마는 잃어버린 4년동안 미처 못했던
인간 만들기 프로젝트에 돌입 하였습니다.
도대체 대화를 할 수 없었던 관계에서
이제 대화를 하고싶어지는 관계로 서서히 돌아오니까
저는 예지때문에 답답했던 시간들이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 됩니다.
그런 호된 홍역을 치루고나니까 작은 변화도 크게 감사하게 되었거든요.
이제 학교로 돌아간 예지가 2학기를 보내고 오면 더 성숙하여
반디농장의 활기를 넣어 줄 것을 기대해 봅니다.
8월 마지막날 예지는 학교로 돌아가고
저는 예슬이 자취방을 봐주러 청주로 갔었습니다.
예슬이는 그간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이번 학기는 부득이
기숙사 떨어져서 학교근처 원룸을 얻게 되었지요.
방학동안 환기를 시키지 않아서 곰팡이 냄새가 가득한 방을
이틀동안 보일러 틀고 에어컨 켜고 선풍기까지 하루종일 틀어서
어느정도 공기를 정화 시키고 돌아 왔습니다.
예슬이 학교는 선생님 사관학교답게 넓고 쾌적한 캠퍼스가
호연지기를 절로 키울 것 같았습니다.
벌써 임용고시 준비를 해야 하는 예슬이지만
장애우 학교에 교육봉사를 자원하는 예슬이의 심성이 기특합니다.
예슬이도 예지도 이 사회에 건강하게 기여하는
일꾼으로 성장하기를 늘 기도합니다.
자전거가 있는 예슬 캠퍼스 풍경.
예슬이는 이 벤취에 종종 누워서 하늘의 별도 달도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도 구경한다 합니다.
얼마나 멋진 시기일까요?(아이가 부러운 엄마)
그래도 아이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에 심취 하더군요.
나도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엄마 마음입니다.
아이와 엄마의 시계 침은 반대방향에 있는데....
엄마 노릇 한다는 것,
아이를 바르게 키운다는 것.
그 모든 일이 의도대로 다 잘 되어 지는 것은 아니기에
세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만 크는게 아니라
엄마도 수없이 거듭나게 되는 것을 경험해요.
사는 중에 가장 큰 몫의 역활이 부모노릇이라
하루도 쉬지 못했던 몸과 마음이 간간히 피로가 몰려오면
일주일만 아무것도 안하고 쉬어 봤으면...그런 생각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아이들과 저...여기까지 왔군요.
아직도 갈길이 멀지만...
농부로 치열하게 거듭나는 과정중에
아이들의 가장 중요한 시기가 겹친터라 제 맘이 부대낄 때가 많았습니다.
내 에너지가 부족해서 본의 아니게 방임한 적도 많았는데
아이들이 건강하게 바르게 커주고 있어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들 공유할 이야기가 참 많지요?
늘...제 이야기 다 들여 주셨는데...
저는 회원님의 진지한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이제 들을 수 있는 계절이 왔거든요.
댓글은 글자수가 무제한이라...댓글로 부모노릇 이야기 공유 하기를 바래요.
9월 10월이 제가 앉아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기랍니다.
엄마이면서...아내이면서...반 가장이면서...여자인...
내 생의 오후 다섯시쯤에서...
가을이 오는 것을 담담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멀리있는 그대에게 오늘은...
아이 이야기로 속내를 풀어 놓아 봅니다.
'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뭄, 그 후...(천경자님 그림) (0) | 2013.10.04 |
---|---|
한알의 씨앗이 주는 기쁨 (0) | 2013.09.21 |
뜨겁고 길었던 2013년 여름, 안녕! (0) | 2013.08.31 |
비 (0) | 2013.08.22 |
제주도 대표풍경 방풍림 삼나무 (0) | 2013.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