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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여행기 1(문화재 답사편)

by 농부김영란 2004. 2. 28.

부끄럽고 부족한 식견으로 써 본 글이지만
사진을 많이 담아서 천천히 뜬 답니다.
사진이 뜰때까지 기다려 주셔서, 부족한 저의 글을, 느낌을
공유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2월 24일 서울역에서 9시 출발,오후 1시 40분경 경주역에 도착했다.
콘도에 여장을 풀고, 2박 3일 일정안에 경주의 모든 것을
샅샅히 보리라는 욕심에 새벽부터 부산을 떨어 몹시 피곤했지만,
언제 다시 경주에 오리 싶어서
감포에 있는 문무 왕릉을 보러 가기로 했다.
차가 없어서 큰 맘먹고 택시를 대절하여 가는 길에
석굴암,감은사지 3층 석탑, 대왕암까지
오후에 보기로 하고 멀미에 지친 아이들을 부추겨서 나섰다.
오후 4시, 벌써 해가 오후의 절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1300년도 전에 만들어진 석굴암의 석가 여래 좌상은
고등 학교때 와서 보고 처음이었는데 감회가 사뭇 달랐다.
어린 시절에 보던 시각과 지금의 시각의 차이이리라.
역사적인 가치의 평가야 전문가들이 다 하신 것이고
난 나름대로...예술가의 고뇌를 엿보는 측면에서 바라 보았다.
그 옛날...자료도,견본도 없었을 터...오직 어느 예술가의 안목에서
나온 작품이었을텐데...지금의 그 어느 예술가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그런 작품을 보니 숙연해 지지 않을수 없었다.
천년을 지났어도 빛 바래지 않는 작품...
어느 예술가의 숭고한 영혼이 여전히 서려 있는 듯 했다.
유감스럽게도 실내에서 석가 여래 좌상 촬영 금지라
외부에서 사진을 찍을수 있는 것만 찍었다.
구형 자동 디카 카메라라 명암이 흐리자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유감스러웠다.예술적인 면을 다 표현치 못한 것이 송구할 뿐이다.



감은 사지 3층 석탑은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탑이라 한다.



문무왕은 통일의 과업을 완성하고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혼이 되겠다하여 바다속에 무덤을 만들어 해저 왕릉이 되었다.
이미 어둠이 깔려있는 바닷가는 인적도 드물었고
왕릉이라고 특별히 주변 시설을 하지도 않아서 적조하기 그지 없었다.
먼길을 달려와서 보기에는 너무 허탈해지는 모습이었지만
문무 대왕같은 이가 오늘날 이 나라에 있어서
표류하는 이 나라를 부강케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만
말없는 파도에 실어 보냈다.


다음날인 25일은 비가 온다는 예보와는 달리 화창하고 따뜻했다.

평화로운 구름 한점 걸려 있는 왕릉...먼 훗날 천년도 더 지나서도
후예들이 그를 기릴 것이란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사후의 영혼 세계를 믿었던 종교가 어불성설은 아닌듯 싶다.
그는 아직도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고스란히 향기를 발하는 우리의 문화 유산...
그 정교한 손길이 자랑 스럽다.
잠시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대비해 보았다.


안압지 성터에서 발굴된 와당에는 섬세하고 정교한 문양들을
아로새긴 것이 그 시대의 화려한 예술성을 엿 볼수 있었다.
금동 반가상등, 장신구에서는 고려 시대, 조선 시대보다도
훨씬 더 정교한 예술성이 뛰어난 것 같았다.



통일 신라 시대의 건축 양식, 석탑등은 지금의 건축물과도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예술성을 띄고 있다.불국사의 화려한 건축 양식은
아무리 쳐다봐도 감탄을 자아내었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눈물겨운 사랑이 전해 내려오는 다보탑과 석가탑.



26일은 어제와는 달리 바람이 심하게 불고 기온이 차가왔지만
포석정과 박물관을 보기로 하고 나섰다.

박물관에서는 각종 장신구, 도자기,불상등...다양하게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섬세한 아름다움이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탁월한 예술성을 지닌 조상들께
부족한 후예로서 부끄러움마저 일었다.
나의 부족한 식견과 치졸한 사진이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음이 송구하고 부끄럽다.
부득이 보이는 것만 대충 묘사하고, 사진을 올릴뿐이나
어른이 되어 다시 본 경주의 신라 유물들은 내게
더욱 깊은 감동과 울림을 주었다.자랑스런 우리의 조상님들!
부끄러운 후예들이 되지 말아야 하건만...




무게가 18.9톤, 구리가 12만근이나 들었으며 무려 30년에 걸쳐
만들었다는 봉덕사 신종(일명 에밀레 종)은 그 웅장함,
섬세한 문양,과학적 원리, 그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든 작품이란 점에서
실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느 예술가가 긴 세월동안 오직 하나의 불후의 작품을 남기기 위해
밤낮을 고심했을 광경이 떠 오르는 듯 했다.
외양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떠나서도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해서도 과학적인
수없는 실험을 거쳐서 비로서...봉덕사 신종은
불가사의같은 소리를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었다.


대부분 6-7세기의 작품들이니 지금으로부터
1300년에서 1400년 전의 유물들인데도 지금의 예술성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
오히려 한편에서는 그 예술성이 더 뛰어날 수도 있음을 느끼자...
우리 민족의 예술성에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어찌 스쳐 지나가는 느낌을 가지고 그 깊은 멋을 다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마는 내게 울려오는 깊은 느낌은 참으로 큰 것이었다.


세계화 추세에 밀려 자긍심도,민족 의식도 퇴락해 가는 요즘,
기상이 높은 정치인 하나가 절실한 지금,
그 어느 시대에도 탁월한 리더가 경제도 문화도,
정치도 번영시켜 꽃을 피웠었고,
부패한 정치인 시대에는 몰락을 초래하여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었었다.
3국을 통일한 무열왕, 문무왕등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고자 염원하여
이토록 찬란한 신라 문명을 꽃 피게 하였건만
퇴락을 보여주는 포석정에서는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던
망국적인 집권층의 호화호식,부패가 극을 이루어서
백성이 피폐하고, 민심이 흉흉하고 끝내는 그 찬란한 신라 문화가
막을 내리게 하였었다.역사가 말하지 않는가?
훗날...망국으로 이끈 정치인의 이름을...
지금 정치에 몸을 담고, 또 정치에 뛰어 들려는 사람들은
이런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훗날...자신의 이름이
너무나 부끄럽게 거론되지 않도록 부디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 할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