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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여행 2

by 농부김영란 2004. 2. 15.

내가 요리사가 되어서 나타났을때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전혀 의외라는 표정으로 바라 보았다.
심지어 있을수 없는, 믿기지 않는 사실이라고,다시 한번 확인했었다.
어린 시절의 날 기억하는 우리집안 친척, 언니들은

내가 요리사가 되었다는 것을 코웃음 쳤고,
내가 만드는 음식이라는 것을 애시당초 인정도 하지 않았다.
그 시절 요리사란 생소한 직업에 속했고,또 화이트 칼라가 아니면

경시하는 사회 풍조가 만연하던 터라(지금보다 훨씬 더)
소위 칼잽이라고 공공연히 부르던 요리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의외의 직업 세계로 뛰어들어서 종횡무진(?) 하는 나를

도무지 인정치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어릴때부터 요리에 재질이 보여 부엌을 드나들며
엄마나 언니들을 돕는다든가 손끝이 맵다든가, 야물다든가...
그런 평가는 커녕..."그러다가 시집가면 소박 맞는다든가,
살림 살이 안 배워서 나중에 어떻게 결혼생활 유지라도 할것인가" 하는
엄마, 언니들 눈에는 심히 우려되는 얌체 막내였던 것이다.
집안 일을 아무런 가치없는 소모적인 일이라 여기며

한심스런(?) 엄마의 삶처럼 살지는 않겠다면서
철없기도 하거니와 뾰족한 심성을 지닌 네째딸 이었던터라
요리사 되기전에는 걸레 빠는 것조차 잘 안해보았던 시건방스런 소녀였었다.
그런 내가 20년 동안 안한 일을 한 삼년 요리사의 길을 가고나서

한꺼번에 다한듯 손등은 독한 세재물에 갈라지고 터지고...

전형적인 노동자의 손으로 전락하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가 가치 높은 일을 하며 손끝에 물을 튕기며 살리라하던

내 오만 불손한 태도가 가증스러워서 신께서 그대로 두었다가는

인간 공해가 될까봐 그래도 사랑하시는 마음에서
날 구원하고자 하신 의도였는지 신께서는 내가 가고자하는 길목마다
덫을 놓아두고 발걸음을 거꾸러 뜨리셨다.


기울어진 가세에다가 남동생을 위해서 나에게까지 배려를 해줄수 없다시는

부모님께 대학 입학금만 주시면 혼자서 해결해 나가겠노라고
약속하고 도전했던 학교는 끝내 혼자 해결하지 못해 도중하차해야만 했었다.

80년대 초...대학생에게는 암울한 바람이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군사 정권에 대항하는 데모는 매일같이 대학가를 휘몰아쳤고
나같은 고학생은 아예 꿈을 접어야하는 또 한가지 시련은

과외 금지 조치가 내린것이다.고액 과외로 물의가 빚어지자 나온 정책인데
실제 피해자는 가난한 고학생들에게만 돌아간 실패한 정책중의 하나가
내 인생의 나침판을 또 한번 돌려 놓았었다.후속 조치로 근로 장학생이니하면서
학교내 공공 근로로 일부 학비를 면제해주기도 했지만

나같이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하는 고학생에게는

배고픈 자에게 과자 한쪽의 성도 안차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헤메었던 아르바이트가 생각난다.학습용 영어 테잎 판매.
10여일을 다녔는데도 고작 이웃집에서 날 불쌍히 봐서 하나 팔아줬을뿐...

정말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었다.
도저히 안되어서 몰래 바이트(몰래 과외 하는 것)를 시작했는데
그 무렵 몰래 바이트가 적발되어 구속되는 사례가 신문에 나고하니
그러다가 신세 망칠까 두려워서 그만 두었었다.
(지금의 몰래 바이트는 술집에 나가는 것이라 함.)
또 한가지 신문에 난 광고보고 갔더니 10여명의 학생들이 찾아왔던 기억이 나는데 행정 구역이 바뀐 지역에 주소가 바뀌었으니

 새로운 문패를  주문 받아 오는 것이란다.가난한 대학생에게는 더욱

암담한 현실이 되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내 아래 남동생마저 고교를 자퇴하고 검정 고시로
대학 가겠다면서 고집부려 서울 올라오는 바람에

난 더욱 학교로 복학하는 상황이 요원해졌다.

그래서 방통대도 입학해 보았지만 내 성에 차지를 않고 방황이 거듭되었다.

결국 용이 되려다 만 이무기가 된 내 남동생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대학을

가게 되는 것을 보고 더이상 내가 주저앉을 수는 없다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었다.아무도 대신 살아줄수도 없고,

아무도 책임져 주지도 못할 내 인생인데...하며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자며 다시 내 인생을 향해 도전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요리사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그 즈음 내가 얼핏 들은 바로는
요리사가 기술이 쌓이게 되면 장래가 촉망된다는 것과

또 외국에라도 가게되면 요리사가 유리하다는 정보를 듣고

무작정 요리사가 되기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관련학과를 지원해서 다시 대학을 갔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시련은 계속 되었지만(추억1에서 밝혔듯이)
난 여기 저기 복병처럼 숨어있는 시련들과 그때부터는 정면 도전할수 있는

자생력이 어느 정도 길러 졌는지  험란한 초보 요리사 시절도 이겨내고

바야흐로 물이 오르기 시작할때...
나에게도 한줄기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노력하고 실력이 있어도 행운의 여신이 손을 잡아주어야만

일이 잘 풀린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일이 생겼다.
그동안 아무리 발버둥쳐도,엉킨 실타레처럼 꼬이기만 하던 내 인생 항로가

잠깐 "쨍하고 해뜰 날"을 맞게 된것이다.
1990년 우리 나라가 러시아와 정식 국교 수교를 한 해이다.
요즘 어제 일도 기억 못하는 나의 기억력으로 어찌 10여년이 넘은

나라일까지 기억하랴만 특별히 기억하게 된 사건이 있었으니
내가 그 혜택을 입어서 드디어 용도 되기전에 승천(?)하는 행운을 맞게 된것이다.
러시아와 국교 수교 기념으로 문화적인 교류의 일환으로 우리 나라를 알리고자
KBS국악팀과 요리사들을 파견하여 축제를 여는 행사에

내가 선발대로 뽑힌 행운이 주어진 것이었다.


그때만해도 러시아는 무시무시한 선입견을 가진 나라였었다.

지금만해도 교류가 활발하지만 막 수교한 그때만해도 러시아는

공산 국가의 종주국이며 엉큼하기짝이 없어서 그 속을 알수없다하여

심지어 속을 알수없는 의뭉한 사람더러 <크렘린>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던 시절이었다.
공산당하면 우리는 빨간 혓바닥을 널름거리며 선량한 토끼를 잡아 먹으려는

늑대에 비유하기 일쑤였던 그 고정 관념을 깨지 못하던 때인데
그런 시절에 내가 한국 요리사로서 러시아에서 열리는

<한국 요리 축제>에 참가하는 일원으로 뽑힌 것이다.
내 요리 실력이 인정 받은 것이 아니라 그즈음만해도 고학력 요리사가 많지 않아서 영어로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는 이유와
장래를 열어 주려는 회사의 배려때문에 그 행운이 내게 온 것이었다.
15일간의 체류 기간 동안 일주일은 <한국 요리 페스티벌>과

나머지 일주일은 KGB의 경호를 받으며 러시아 곳곳을 여행하는 호사를 누렸다.
그때의 벅찬 감격을 이제와서 다 담으려니 내 둔탁한 기억력으로는 아슴거리나
축제를 성황리에 끝내고 무대위로 올라가서 다함께 부르던 <서울의 찬가>가

아직도 내 안에서 벅찬 감격으로 메아리 친다.


러시아의 화려한 유적을 돌아보며 감탄했던 기억이 나고,

그리고 가도 가도 끝없는 평원을 맘껏 달리는 길에서 우리나라의 좁은 길과

국토가 생각나서 내 나라가 안타깝다는 생각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 경호를 맡았던 KGB와 친해져서 잘 어울리는 것을 보고
회사의 간부께서 그가 넌즈시 KGB라 일러 주어서 놀랐던 기억도 난다.
개인적으로는 더없이 순박하고, 친절하고,인간적으로 느껴졌는데
내 안의 고정 관념(무서운 소련 비밀 경찰)이 떠오르자 그가 경계되기 시작했다.

그러니 의식 교육이란 얼마나 편협되고 주관적인가하고 생각된다.
그러나 선량하고 순박해 보이던 그가 카자흐스탄에서 암벽 타기,

사막 횡단하기등의 극기 훈련을 찍은 사진을 보여 주어서 007영화에서나 보던
소련 비밀 경찰들의 훈련 상황을 느낄수 있었다.

하지만 체류 기간 내내 그 청년은 친절하고 인간적이어서

오랜 친구처럼 정답게 해주니 내가 받은 이념 교육에 혼돈이 몰려 왔던것 같다.

지금에야 남북 교류도 활발하고 이념의 허상도 많이 깨뜨려지고 있지만

그즈음만해도 우리가 받은 반공 교육덕에 북한 사람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이제야 그 모든 것이 정치적 이념의 산물이었던 것을 깨닫는다.

그해 내 인생 항로가 상승 기류를 탔는지 귀국하자 매스컴 혜택도 받고
일년에 한명씩 관광 협회가 선정하는 "영원한 호텔맨"상도 시상하고
회사내의 입지도 탄탄해져서 그때까지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회사의 윗분들까지도 날 아는체를 해 주셨다.심지어 어떤이의 스카웃 제의까지 들어왔다.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었다.그때까지만해도 내 요리 수준은
흉내내는 수준이었을뿐인데도 난 장인 정신을 잠시 잊고 우쭐해하기까지 했다.

적어도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수준으로 이르자면, 묵묵히
자신과의 싸움과 특별한 노력으로 20여년은 정교하게 가다듬어야만 비로서
작품다운 작품을 만들어 낼수 있는 장인의 경지로 진입하건만
난 10여년도 쌓지 않은 길에서 운좋게 상승 기류 한번 타고나니
매스컴이니 주변에서 붕붕 띄워주니 가벼운 내 인격이 또 우쭐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과정을 신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것일까?
전편 칼럼에서 밝혔듯이 난 등 떠밀려서 그때 회사의 노조 대위원을 맡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해 13일간의 파업을 맞게 되었다.
그 파업이후 난 개인적으로 구제 되었지만 옆 동료와 회사 분위기가

너무나 살벌하고,그리고 나도 스스로의 안일을 탈피하기 위하여

분위기를 전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s호텔 경력직 특채로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기술 분야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정진해야만 실력이 쌓이기도 해서
회사를 옮겼는데 그때가지만해도 나이 서른을 훌쩍 넘기고도
결혼에대해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일에만 열중하던 나인데
옮긴 회사에서 남편을 만나고, 지금 세 아이를 낳아 "영원한 호텔 맨"은커녕

"영원한 주부"가 된것이 미리 예비된 나의 길이었을까.
첫 아이를 낳고도 내 길을 가보리라던 나의 계획을

첫 아이가 자폐 증상을 보임으로써 할수없이 도중 하차하고

지금껏 엉거주춤한 상태의 엄마 노릇하느라 강산이 바뀐 세월을 보내고나니...

이제 그 치열하게 끓어 오르던 젊은 날의 가당찮은 오만도 사그라지고,

날 과신하던 치기도 부끄럽게 여겨지고, 하마트면 많은 이들을 비하시켜 보려던

내안의 꼬인 의식이 얼마나 내 좁은 시야였음을 인정케해준

위대한 세월의 힘을 느낀다.


<인간 안된 잘난 나>로 살기보다 <인간적인 나>로 살기를 허용하신 신의 배려인가.
그간 엄마로서만 만족할수 없어서 한때 발버둥치던 시절을 겪긴 했지만

이제는 세월과 환경에 순응하는 나가 된 것이 참으로 다행으로 여긴다.
신은 나를 몹시도 사랑하셔서 나에게 그렇게도 많은 시련을 주신거라 생각된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인간적인 욕망의 기운을 다스리지 못하고
옆길로 샐라치면 덫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신께서는
부족한 나같은 사람까지 설쳐대는 무대를 보고 싶지 않아 하신다는 것을 깨닫지만
때로는 그것도 잊어 버리고, 또 나를 흔들어 댈 때가 있다.

 

오늘,고개 숙인 나.
앞으로 나에게 어떤 길이 전개 될지라도 "엄마"라는 사실 하나로도
행복할수 있기를 신께서 허락하신 것을 느낀다.
아이들이 우주로 느낄수 있는 엄마.사랑해야 할 내 삶인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