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팔순이 된 친정 엄마. 난 엄마의 넷째딸이며 막내딸이다.
내 아래 네살터울 남동생을 보기위해 줄줄이 사탕으로 낳은 딸들.
종부의 삶에 오욕의 세월이었을 딸들이지만, 그중에 네번째로 태어난 나인데도
엄마에겐 남동생만큼이나 사랑해 주셨던 대상이 나이다.
내가 서른 여덟에 막둥이를 보고 나서야 엄마의 그 심정을 더욱 헤아리게 되었다.
막내에겐...능력이 쇠잔해 가는 부모가 줄수 있는게 무한의 사랑인지 절로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어제 친정 엄마에게서 택배 한 박스를 받았다. 아버지 요양차 들어갔던 시골에
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나서도 눌러 사시는 엄마는 텃밭이 천여평 있어서
힘들다시면서도 소일거리삼아 돈으로는 결코 환산할 수 없는 농사를 몇 해 지으셨다.
가을에 결실을 보면 씨앗 값도 안될 지경이라는 농사지만 엄마에게는 살아있음의 몸짓이며,
사업 실패를 하여 전전하고 있는 엄마의 최고의 삶의 희망인 남동생이
금의환향 하기만을 기다리는, 세월 삭히는 가장 좋은 방편이기도 한 농삿일이라
힘에 부친다시면서도 손에 놓지를 못하셨다.
가을에 걷어 들이는 농사라야 고작 콩 몇말, 팥 몇말 정도였으니
인건비는 전혀 셈할 수도 없고 비료값도 안되는 것들이라
딸들이 넘볼 수도 없어서 엄마가 알아서 하시라고 서로 넘보지 않기로 묵인하고 있었다.
그런 엄마가 올해는 도저히 힘에 부쳐서 농삿일을 못하시겠다 하셨다.
얼마 전서부터 전화할 때마다 자꾸만 우리들에게 못해 준 것만 생각나서 가슴이 아프다시면서
쨘한 말들을 하시곤 하시는게 아무래도 기력이 쇠잔해지시니
엄마의 얼마남지 않는 생을 예감하시는게 아닌가 싶어서 맘이 무거워지곤 했는데
어제는 보내온 택배 속에서 나온 씨앗들을 보니...가슴이 너무 아팠다.
엄마이기 때문에, 엄마만이 할수 있는 가이없는 사랑이 그속에 담겨 있기에...
아마도 올해 심으시려고 갈무리 해 두었던 씨앗들인가본데
올해는 그나마 소일거리셨던 농삿일도 버거워 하시는 걸 보니
아무래도 좋지않는 예감이 밀려온다.막내딸이 멀리 제주도에 이사간다하니
엄마는 제주도나 서울이나 큰 차이가 없음에도 바다 건너 간다고 눈시울을 적셨었는데
내가 귤밭을 사서 농사를 짓겠다고 하자 왜 힘든 농삿일을 하냐고 걱정 하셨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의미가 있는 일을 해보고자 선택 하였는데
엄마에겐 농삿일이 소득도 없이 힘들기만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여
배운 내가 (엄마가 보기엔) 왜 그런 투박한 일을 하냐시면서도 내가 행복해하자 안심 하셨다.
그리고...남편과는 항상 잘 살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신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외도의 세월속에서도 굳건한 의지로 가정을 지키며 살아오신 분이라
딸들에게 늘상 하시는 말씀이 남편 잘 공양하고 자식 잘 거두고 살라신다.
그런 엄마의 삶이 답답하고 숨막히게 보여서 엄마의 삶처럼 살지 않겠다고
도리질 쳤었던 젊은 날이 있었다.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나도 모르게 엄마의 삶을 답습하며 살고 있을 때가 한두번이 아님을 느낄때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많다.그래서 딸을 선 볼때 엄마의 삶을 보라 했던가?
엄마가 내게 씨앗을 싸보내 주시면서...아마도 이게 막내딸에게 줄수 있는
엄마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 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젖어왔다.
씨앗이 너무 많아 내가 귤밭 주변에 조그맣게 일군 텃밭으로는 어림없는 양이지만
엄마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올해 다 못 뿌리면 내년이라도 남겨 두었다가
열배 스무배로 번식시켜 행여나 엄마가 돌아 가시고라도
계속 번창시켜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엄마의 씨앗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시고
그동안 엄마의 희망이고 삶의 의지였던 씨앗들을 내게 보내셨다고 생각이 들었다.
돈으로는 결코 환산할 수 없는 씨앗과
배추 시래기(내가 우거지를 무지 좋아하시는 것을 알고서),
그리고 엄나무 껍질은 혈액 순환과 피를 맑게 하는데 좋다시며 끓여서 물을 마시라 한다.
굳이 착불 택배를 보내라 하였는데 실은 이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되겠는가만
엄마의 사랑이 그곳에 듬뿍 담겨 있음을 알기에 그 어떤 선물보다도 내 가슴이 찡해왔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은 눈물이다.
아버지 사업 실패로 내가 고등학교때부터 우리집은 삶의 격랑과 회오리에 휩쌓였었다.
결코 강하지 못했던 내가 강한척 살아내야만 했던 그 계기들이
내 삶의 가장 찬란해야 할 이십대를 회색빛으로 물들게 했어도
돌아보면 그런 삶의 요소들에 굴복치 않고 도전과 응전에 단련되게 되었던 것이
어느날인가 신이 내게 주신 또 하나의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30대가 다가고 사십대를 맞으려고 하던 때이었었다.
내 삶에 내가 온전한 주체가 되어서 이끌어 가야 했을때,
거기다가 아이들의 운명의 열쇠를 쥐고 있는 부모가 되었다는 자각이 들었을 때,
내가 그토록 힘겨워하면서 걸어왔던 이십대의 시간들이
오히려 내게 단단한 나이테를 만들어 주었음에 감사해야함을 느꼈는데
그것은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을 때도 종손이라는 이유로 모든 사람이 희생해가면서
가문의 단단한 기둥이 되라고 밀었던 막내 외아들 남동생이
사회에 나와서 겪는 시행착오가 안타까왔는데
나는 미리 매맞은 자의 여유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생 새옹지마란 말이 회자되고 있는데, 아직은 내가 다 체험치는 못하였지만
아무리 긴 터널이라도 끝이 있다는 것과, 새 날은 어김없이 온다는 것과,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다는 것,거북이와 토끼의 경주, 바람과 햇볕의 내기등등...
아주 단순한 진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머리 아프게 외워댔던 형이상학적인 학문들보다도...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진리들이 다 경험에서 우러난 삶의 지혜들이란 것을 깨닫는다.
엄마가 보내주신 씨앗...그것은 단순한 씨앗이 아닐것이란 생각이 든다.
엄마가 내게 남겨주고자 하는 정신적인 유산이 될것이다.
한줌의 씨앗이 한말이 되는 원리를 체득하여 그 어떤 순간에도 희망의 씨앗을 심으시라는...
아마도...한동안 난...씨앗을 뿌리며 눈물까지도 함께 뿌리게 될 것 같다.
2005.4.8.英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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