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를 떠올리니 머뭇거려진다. 애증이 교차한다.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을 되새기는 글이니
증(憎)은 빼고 애(愛)만 써 보아야겠다.^^
광산을 할 때 아부지는 멋있어 보이는 사업가셨다.
외모나 태도도 선비연하고, 성품도 점잖아서 주변에서 존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어릴때의 기억으로 아부지가 화를 내거나 큰소리 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한의사셨던 할아버지께 어깨 너머로 배운 한의실력도 상당하여
주변의 아픈 사람들도 많이 고쳐 주셨다.
맥도 짚고, 침도 놓았으며 탕제도 하셨어서 ,우리집은 늘 한약 다리는 냄새가 그윽 했었다.
중풍 환자도 고치셨고 나중에는 한약방 자격증도 따셨다.
한학에 조예가 깊으셔서 풍수지리학과 주역도 통달 하셨었다.
묘자리도 잘 보셔서 불려 다니시기도 하셨었다.
그런 아부지가 사업을 벌리셨다가 실패한 것이 내가 기억나는 것만도 크게 3번이나 되었으니
풍운아 아부지를 만나 일생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만 한 엄마의 삶이 아프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이었던가?
막내 남동생과 나를 무릎에 앉히시고 소월의 시를 읊어주곤 하셨다.
소월이 일가친척이라서 어릴때 먼발치서 보곤 했었단다.
자료를 찾아보니 소월이 공주김씨로 평안북도 집성촌에 살았으니 아부지의 고향과 일치 하였다.
아부지는 아마도 소월의 흉내를 냈던가 싶은 생각이 든다.
금광을 하신 것도, 신춘문예에 응모 하신 것도 어릴때 보았던 소월의 삶을 흉내냈던가 싶다.
나의 어렴풋한 기억으로 아부지가 신춘문예에 응모를 하고서는
당선소식을 기다렸는데 당선 소식은 오지 않았던 것 같다.
아부지가 쓴 원고를 읽어 주시기도 했는데 춘향전처럼 문어체가 곁들여 있어서
어린 내가 들어도 좀 우스운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아부지가 해방전에 징용으로 끌려 가려고 훈련을 받다가
일본교관을 때리고 도망쳐서 산속에서 3년을 숨어 지내셨다 하는 이야기가
신춘문예의 글감이었다.
산속에서 숨어 지내면서 솔잎과 생콩3알씩을 먹고 사셨다 했다.
한밤중에 산에서 내려와서 집에 들려서 콩을 지고 가셨다는데
아부지의 탈영으로 할머니 할아버지가 곤욕을 치르셨다 한다.
그래도 그때 아부지가 대동아전쟁에 끌려 가셨더라면 오늘날 나도 없을 것이다.
산속동굴 생활 하면서 풍수지리학도,주역도 통달 하셨다 한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서(1925년생) 청년기를 보냈고, 6,25전쟁을 겪고...
그런 사선을 넘었으니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샘 솟았을 것 같다.
내가 한때 소월의 시 <초혼>을 좋아한 적 있었는데
내게도 먼지만큼의 소월유전자(조상이 같으니)가 흘러서인가?
이은하가 절절하게 불러서 더 가슴에 새겨졌던 초혼을 다시 한번 불러본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초혼》 전문)
[네이버 지식백과] 초혼 [招魂] (두산백과)
내 어릴때 금광업을 하여서 우리가 산골에 살게 된 풍경이 단편적으로 떠오른다.
금을 만드는 방법은 큰 쇳덩이의 절구공이 여러개가 돌을 가루로 부셔서
돌가루에 물을 섞어서 흘려 보내면 동판에 금과 수은등이 달라붓고 돌가루는 흘러 내려 갔다.
동판에 달라붙은 금을 긁어서 고온에다가 구우면 노란색 금으로 변했다.
아부지가 금을 1차로 긁고 나서도 엄마가 다시 한번 꼼꼼히 긁으면
콩말만한 금덩어리가 나오기도 했었다.
금돌을 캐던 인부가 수칙을 어기고 갱도안에서 불을 켰다가
광산이 폭팔하여 우리집의 금광업은 폐업하게 되었다.
우리집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후 우리집은 작은 아부지의 도움으로 읍내로 나오게 되었다.
내가 기억나는 첫번째 아부지의 사업실패였다.
우리집은 할아버지께서 이북에서 아들 셋만 데리고 남하 하셔서
일가친척이 없기에 아부지 3형제는 우애가 각별했었다.
할머니가 이룬 재산으로 아부지가 사업을 하여 실패했어도
아부지를 부모처럼 여겨서 계속 사업자금을 대주는 막내 삼촌이 계셨어서
그 후로도 아부지는 두번의 사업을 일으키고 실패를 하셨다.
(성공한 기억이 안나네~^^)
그후로도 2번의 실패 후...내 나이가 되어서 아부지는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아서
그냥 식물인간처럼 살다 가셨다.
아아~ 나의 아부지~~~(꺼이 꺼이~)
아부지의 삶도 아프고, 엄마의 세월도 아프고
그 후손인 나도 내내 아팠다.
삶은...강물처럼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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