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아오는 동안 5번의 거주지를 옮겼다.(경상도,서울, 제주도...이런 식으로)
이사는 수없이 했지만 큰 거주지를 5번 옮겼다.
내가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가기전에 태어나서 살던 곳은
아주 짧은 몇편의 기억만 나고 이사하여서 국민학교1학년부터 4학년 초까지
읍내로 나오기 전 두메산골에 살던 기억이 가장 아름답게 떠오른다.
이북에서 살던 할아버지가 해방직후 아들 셋만 데리고 남하하여
전쟁의 화를 피하기위해 경상북도 봉화에 터를 잡으셨다.(오지로 피난 하셨다)
할아버지는 한의사이시며 전형적인 선비셨는데 함경도 출신의 또순이 할머니가
이재에 밝으셔서 큰 재산을 이루셨다 한다.그런데 할머니가 일찍 돌아 가시고
경제와 경영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버지가 그 후 사업을 하여 재산을 다 잃어 버리셨다.
경북 봉화에서 예천 어느 산골짜기로 이사 간 것은 내가 대여섯 살때 쯤 이였던 것 같다.
아버지가 금광을 하기 위해 더욱더 두메산골로 이사한 것이었다.
마을(수십가구가 모여 사는) 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외딴 곳에 살았었다.
두메산골, 첩첩산중, 오지, 그런 곳이었다.
우리집 위로도 더 골짜기로 올라가면 드문 드문 몇집이 있긴 했는데
화전민이거나 한센병자(나환자)가 살고 있었다.
내 어릴적 기억은 세상을 모르고 보호받던 시절이었으므로
내게는 행복한 추억의 장면만 남아 있는데 광산 하다가 몇년 후
금광이 무너지면서 인명사고가 나서 크게 망한 후 부모님이 겪은 어려움은
내가 어려서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내가 초등 1학년(1968년)부터 1971년 봄(4학년 초)까지 내가 산골에서 살던 추억들이
종종 아름다운 사진처럼 떠오르곤 한다.
나의 삶의 연대기이도 하고, 우리 나이가 살아온 역사이기도 하여
나는 정신이 온전할 때 하나씩 기록해 두려고 한다.
동영상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기억이 아니라서
한장의 사진처럼 장면 장면들이 생각 나서
생각나는대로 기록해 보려고 한다.
이태수 화백님 그림
1. 국민 학교 시절
우리가 다니던 국민 학교는 왕복 이십리(8km)였고
면소재지에 있던 중학교는 왕복 사십리길(16km)이였어서
나의 남동생이 국민학교 입학하고 나의 위의 언니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우리는 학교때문에 읍내로 나왔다.
읍내에는 수도도 있었고 전깃불도 있어서 산골에 살던 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로 공간이동하였다.
나의 초등 저학년 시절은 아버지의 광산때문에 문명이 거북이 걸음을 하는
두메산골에 살았는데 내 추억은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기억된다.
우리집이 광산을 하느라고 시골중에도 마을에서 떨어진 두메산골에 살았는데
우리집보다도 더 깊은 산골에 사는 아이들이 몇명 있어서
학교를 갈때는 모여서 가곤 했다. 차가 다니는 큰 길이 있었으나
산골 지름길로 가야만 빨라서 서너명이 모여서 가야 무섭지가 않아서
늘 함께 모여서 등교도 하고 하교도 했다.
(그때는 문둥병자가 참꽃나무 뒤에 숨었다가 아이들이 참꽃을 따 먹으러 오면
잡아서 간을 빼 먹는다는 소문이 있어서 아이들이 항상 함께 다니라고 어른들이 신신당부 했었다.)
초등학교는 가는데만 4km 십리길이여서 빠른걸음으로 걷거나 뛰어야
1시간30분에서 2시간 걸렸다.
동이 트자마자 출발하여 9시까지는 학교에 도착해야 하는데
어린아이들 걸음이라서 지각하는 것은 다반사였었다.
그러다가 비가 오거나하면 개울물이 불어서 허리위까지 물이 넘치므로 위험하다고 되돌아 오고,
학교 가다가보면 해가 중천에 떠서 학교 도착해도 너무 늦을 것 같으면
아예 학교 안가고 소꿉놀이 하다가 집에 돌아 가기도 하였다.
그러니 결석을 밥 먹듯이 했다는 표현도 지나친 과장은 아니었다.
이밥(쌀밥)을 그렇게 맘 놓고 먹지 못하고 잡곡밥만 먹었으니
그 표현이 그대로 맞는 셈이었다.
학교를 지각할 것 같은 것은 시계를 보고 아는 것이 아니고(시계도 없었다)
말 그대로 해시계가 시계였다. 해가 산중턱에서 한뼘이면 8시.두뼘이면 9시...그런 셈이었는데
해의 높이를 보고 우리는 학교 가는 발걸음을 재촉 하기도 했고 느긋하게 걷기도 했다.
그러다가 흐린 날이나 비가 오면 해시계가 없어서
하루 두번 지나가는 버스를 보고 시간 가늠을 했었다.
우리가 산골 모퉁이를 돌면 멀리 버스가 지나 다니는 큰 신작로가 보였는데
어느 지점 쯤 오면 버스가 어디를 지나가는지가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산모퉁이를 돌자마자 버스가 지나가는게 보이면 그때는 이미 학교에 가봤자
지각하기 쉽상이었으니 그때부터 뜀박질로 내 달려야만 간신히
첫 시간 종치기전에 골인 할 수 있었는데 그 중에 1학년 아우가 딸렸으면
그렇게 가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우리는 보자기로 책을 싸매 여자애들은 허리에 매고
남자애들은 어깨에 걸쳐 맸는데 그것을 책보라 하였다.
필통에는 연필과 지우개와 연필 깎는 칼이 들었는데
연필을 잘 못 깎으니 엄마가 집에서 깎아주곤 했는데
학교 가는 중에 내 달리면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방울 소리 같았다.
그런데 필통 안에서 연필이 움직아면서 학교에 가면 거의 다 부러져 있었다.
연필도 공책도 다 귀한 시절이었기에 연필이 자꾸 부러지는 것을 막으려고
다 쓴 볼펜심을 잘라서 끼우기도 했었다.
학생들은 한반에 60명에서 70명 정도였고
한 학년에 2반이 있었다.(시골 몇 동네에서 오는 아이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기억 나는 것이 있는데 급식으로 빵을 주는 것이었다.
옥수수가루와 우유가루를 넣어 만든 식빵(지금의 식빵 모양과 같다)인데
점심 때면 학생 당 하나씩 주었었다.학교에서 열심히 공부 한 기억은 안나고
그 빵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을 보니 공부는 글자만 깨치면 되고
학교에 가는 것이 의미였던 것 같다. 공부를 열심히 한 기억은 없고
학교에서 책을 빌려와서 책을 많이 읽은 기억은 난다.
책이 너무 재미 있어서 2-3일에 한권씩 빌려다가 읽었는데
보통때는 호롱불을 쓰다가 책 읽을때는 어둡다고 엄마가 램프불이나 간데라불을 켜 주셨다.
식빵은 점심시간만 되면 학생 1명당 하나씩 주는데 모두 그 시간만 기다렸다.
식빵 배급 당번이 있어서 빵을 받아와서 한명씩 나누어 주는데
그날 결석생이 있으면 빵이 한두개 남을 때가 있었다.
그러면 선생님이 그 빵을 당번에게 수고했다고 줄때가 있는데 나도 가끔 빵을 두개 탈 때가 있으면
한개는 집에 가져가서 엄마에게 맛 보일 생각을 하면 집까지 날아가는 기분이었었다.
나는 그 빵이 너무 맛있어서 남겨서 집까지 가지고 가려고 해도
집까지가 10리길이라서 손톱만큼씩만 떼어서 먹어도 집까지 가면 남지를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은 시간 여유가 있어서 산골길로 오지 않고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길로 오는 날이 많았는데
길가에 미류나무가 20여m 간격으로 심어져 있었다.
그 빵을 먹지 않으려해도 너무 먹고 싶어서(배도 고프고)
미류나무 하나 간격마다 콩말만큼 떼어서 입에 넣고 녹여서 먹어도
집까지 운반 할 수가 없는데 빵 당번으로 두개를 받는 날은
온전히 엄마에게 하나를 가져다 줄 수가 있어서 빵당번 하기만 기다려도
돌아가면서 하기 때문에 일년에 두어번 엄마에게 빵을 가져다 드렸었다.
그때 우리들의 간식이란 감자, 고구마나 산열매(머루 다래, 감, 고염, 밤)이었는데
어찌보면 지금의 유기농 식품을 우리는 먹고 자란 것이었다.
진달래꽃 따먹던 것, 송구(소나무껍질)씹기,보리와 밀 이삭 구워먹기,보리 깜부기도 먹은 기억이 난다.
메뚜기 잡아서 강아지 풀에 꿰어서 구워먹기,바위를 망치로 내려쳐서 버들치 기절시켜서 잡기,
가재잡기,떡개구리 잡아서 뒷다리 구워먹기,
간혹 우리가 멱 감던 개울에 어른들이 사이나를 뿌려서 물고기가 둥둥 떠내려 오던 일,
추수하고나서 나락(벼) 이삭 주워서 학교 내던 일.(학교에서는 보리와 벼이삭을 모아서 팔아서 책을 샀다)
아궁이 부엌에 쓸 불쏘시게 소나무 간솔 하던 것,풍로를 돌려서 불 붙히기,산토끼 똥 찾아서 옹로(올무) 놓아 산토끼 잡던 추억.
초가지붕 사이로 밤에 손을 넣으면 잠 자던 산새의 따뜻한 체온도 떠오른다.
송충이 잡으러 깡통 들고 산에 가던 일,거머리가 달라붙는 논에 들어 가서 모내기 돕기 하던 일,
우리가 놀던 방법은 공기놀이,옥대차기,구슬치기,제기차기,딱지치기,고무줄놀이,실엮기...등등
(떠올리며 열거하자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와 비슷한 거 같다.)
우리집은 처음에 광산 할때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으나
내가 2학년때쯤인가(아리송) 광산 인부가 금광굴안에서 불을 잘못 취급하여 터져서
광산이 무너져서 인명사고까지 나는 바람에 폭삭 망하게 되었다.
그때 양식이 없어서 시래기밥 감자밥등을 많이 먹은 기억이 난다.
시래기 80%와 잡곡, 감자80%와 밀가루...그런 배합이었다.
지금은 별미가 된 밥들이지만 그때는 쌀밥은 생일날 정도만 먹는 밥이었다.
세상 모르는 우리는 감자밥이 싫다고 투정을 부렸지만
그 시절을 이겨내야만 했던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70년대 들어서면서 새마을 운동이 불같이 일어나고
통일벼로 다수확이 되면서 쌀밥이 보편화 되었고,몇년 지나지 않아서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는 혼분식 장려운동이 벌어져서 도시락에
잡곡이나 혼식검사까지 하였었다.선생님께 혼나지 않으려고
친구들 도시락의 보리쌀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하였었다.
지금도 광속으로 달리는 시대지만, 우리시대도 변화의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머뭇거리고 있으면 따라잡기 힘들었는데
그렇게 달려가기만 하는 습성이 몸에 배다보니
달리지 않고 멈춰서서 바라보고 점검하는 자세를 잃어 버리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우리 모두...한 발 멈춰 서서 삶을 바라보고
재점검 해보기를 원해도 오랫동안 달리기만 하던 열차에 탑승했던 우리들이라
혼자 내려서서 스스로 잘 살아낼 의지를 확인하는 것을 머뭇거리게 되는 것 같다.
뭉쳐 있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증상.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모두 나와 같은 시대를 거쳐 왔기에
그동안 미친듯이 달려 오면서 가정을 이루었고, 아이들을 키워냈고
부모님까지 모셔야하는 세대가 되었지만
정작 자신은 준비되지 못한 노년때문에 불안하게 된 세대들이다.
나의 국민학교 1학년 때 소 눈알만한 눈깔사탕 하나가 1원이었던 기억이 난다.
소풍 갈때 10원을 가지고 가면 꽤 큰 돈이었던 것 같다.
시골 국민학교 운동회는 온 동네 잔치이기도 하여서 부모님들까지 다 참석해서
만국기가 휘날리는 운동장에서 음식을 가득히 싸 와서 먹고 마시고 즐겼다.
그 중에 내가 잊지못할 음식이 있었는데 운동장 한켠에서 가마솥을 걸고 끓이던 육개장이었다.
고기는 조금뿐이고 기름이 둥둥 뜨던, 소고기가 목욕하고 지나간 것 같은 육개장이었지만
생일 쯤에나 얻어 먹던 고깃국이라 그 육개장 맛은 기억속에서 최고의 맛으로 기억된다.
배 고프고 없던 시절에 쌀밥과 고깃국은 최상의 만찬이었으므로
그 맛이 아직도 생생하게 최고의 맛으로 남아 있나부다.
그런 시대를 건너 왔으니 지금의 풍요는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문명의 혜택을 보려면 장을 가야 하는데 면소재지에 가야만 생필품 장을 볼 수가 있었다.
그 면소재지에 중학교가 하나 있었고 내 위의 언니는 중학교에 입학하니
가는 길만 20리(8km)라 새벽에 출발해서 늦은밤에 집에 오게 되어서
우리는 읍내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면소재지에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역시 먹는 것.^^
김이 모락모락 나던 찐빵이다. 지금의 호빵 모습인데
엄마따라 장에 따라가고 싶은 유일한 이유가 그 찐빵 때문이었다.
그 찐빵 하나 얻어 먹고 싶어서 엄마따라 20리 장터에 다녀 오던 길.
엄마는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나는 쫄래쫄래 뒤따라 왔는데
집에 도착하면 언제나 어둑해져 있었다.
그런데 읍내로 이사 나오니 과거의 세계에서 현재의 세계로 타임머신 타고 이동한 것처럼
문명의 세계로 순간이동한 것 같았다.
전기불로 온 사방이 환했고,옹달샘은 어디에도 없었고
수도에서 사철 물이 콸콸 쏟아졌다.
밤 하늘의 은하수도 덜 빛났고,찐빵은 어디에나 있었다.
라디오 시대에서 TV 시대로 옮겨가니 우리들의 모든 화제가 tv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나의 추억도 그때부터 필름이 끊긴 듯...별로 아름다운 추억이 생각나지 않는다.
자연속에서 뛰어 놀던...내 유년의 어느 한 시점이
내겐 샛별처럼 안에서 빛나고 있다.
(이 글 쓰다보니...촌 놈, 참으로 출세했네~ 그런 생각이 든다.ㅎㅎ...
내 어린 날 친구들 중에는 아직도 고향 땅을 지키고 있는 굽은 소나무도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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