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별것을 다 쓰고 싶어진다.
기운이 충천할 때 기록해 두어야만 할 것 같다,웬지...
자꾸만 몸의 에너지도 마음의 에너지도 축소 되어지니
어느 순간 기운 돋을 때 쓰고 싶던 일들이
또 어느 순간 부질없는 일 같아지니...
마음 동할 때 휘리리릭...내쳐 써 봐야겠다.
겨우내내 귤 이야기만 하고 , 귤 생각만 했더니
과부하가 걸려서 아무 생각도 안 나더니
한(온) 겨울을 눈 코 뜰새없이 바쁘고, 넘치게 노동을 하고나니
지금은 손가락 마디마디 붓고 안 쑤시는 데가 없다.
유기농 귤농사 10년에 골병 들었다고 몸이 징징댄다.
사람들은 귀농 성공했다고 추켜 세우고
멘토니~하며 성공사례까지 발표 하라고 등 떠밀지만...
"뉘들이 농사를 알어~" 하는~~~자조감이 마구 밀려 온다.
먹고 사는 걱정 크게 안하고, 아이들 다 키우고
유유자적하게 은퇴 했다면 모를까~~~
세아이의 부모가 고등학생이 되기도전에 수입전무의 상태가 되었을 때,
그것은 어두운 바다위의 절해고도였다.
내 삶이 내게 절대절명의 위기를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바다위로 등 떠밀어내니
수영도 못하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동안 한번도 안 써본 내 안의 온 힘을 다 꺼내 쓰는 용기를 내게 해주었지.
그냥 앉아서 물에 빠져 죽을 수는 없잖아~
뒤돌아 본 10년 세월이 그랬다.
온 몸을 다 불 태웠어~
머리로 농사 짓지 않고 온 몸으로 농사 지었어~
누가 봐도 왕무식하게 일했어.
덕분에 농부의 몸과 농부의 마음이 제대로 되어 가는 것 같아.
어떤 기계의 도움없이 몸으로 다 해냈어.
지난 겨울도 수확한 귤을 들고, 나르고, 리어카를 끌고
택배 포장해서 나르고, 선과기없이 모두 손으로 선별하고...
최첨단 기계 시대에 온 몸으로 무식하게 다 해냈지.
쓰러지기 일보 전에 겨울이 끝나곤 하더라고.
그렇게 10년 세월이 되었네~~~
이런 나를 스스로 달래 주려고 나는 늘 꽃을 키웠지.
차실을 만들고 일년에 두어번도 편안하게 쉬면서
차한잔 마시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면서도
나를 달래고 고마운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짬짬이 쉼터를 꾸미곤 했지.
그 꽃밭만 보고, 누군가는 나를 부러워했지.
꽃을 키우고, 꽃을 즐기며, 꽃을 누리는,
나를 부러워했지.
아직도 꽃씨도 못 받아서 그대로 방치된 꽃밭도
내가 바빠서 그리 된 줄 모르고 운치있다고 생각해주었지.
나는 단칸셋방에 살았어도 늘 화분 몇개는 키워야 숨을 쉬었는데
식물에서 에너지를 얻는 종족이라서 농부가 된 것은 몸은 고단했어도
정신은 건강하고 풍요해지는 과정이었어.
내 나이 쉰넷,1961년생, 소띠 아줌마.
때로 나를 분석해보면...딱...황소다.
<내 안에 남자 있다>싶을만큼 골골거리다가도
하고자하는 일이 생기면 괴력이 발휘될 때가 있다.
타고난 체력이 약해서 방전되기 일쑤인데도
조금만 에너지가 모이면 의기가 충천해지곤 했다.
그런데 그 에너지가 점점 더 소진되어감을 느낀다.
무모하게 내 에너지를 마구 써댔기 때문이다.
이제 좀 몸을 사리라고 경계경보가 수십번 울렸다.
그래서 지난 겨울은 넘치지 않으려고 조심조심해서 건너왔다.
다행이 쓰러지지는 않았다.
김 영란의 왕무식 인생은 농부시절만 적용된게 아니다.
내 인생 전체가 왕무식 그 자체다.
운전도 앞으로만 달려가지 후진도 잘 못해서 들이받기 일쑤다.
일년밖에 안 된 차가 여기저기 기스 투성이다.
삼십대에 아이 셋을 배를 가르고 꺼냈다.그리고도 또 배를 갈랐다.
기초체력도 약한 내가 삼십대에 배를 네번이나 가르고나니
사십대는 기진맥진 했었다.
겨우 어린 아이들 거두며, 길길대며 맞은 사십대에 남편이 명퇴 당했다.
잠시도 쉴 틈을 안주고 몰아치는 내 인생에 신을 잠시 원망했다.
한시도 쉬지않고, 허리띠 졸라매고 살았는데
도대체 언제 한번 우아하게 살아보나~하며...
"전생에 무신 잘못을 많이 했길래 내 인생 이리도 숨 차게 한다냐~"
생각해 볼 틈도 없이 내쳐 달렸다.
내 나이 마흔 다섯에 전업 아줌마에서 농부 선언했다.
어쩌겠어~
남편은 조만간 명퇴 당할 거고 아이는 셋이나 되는데...
이 나이 쯤 오면...좀 살만 할 줄 알았는데
태산이 내 눈앞에서 오르라 하니...
그것도 혼자가 아니고 아이를 셋이나 업고 남편까지 끌고 가라하니...
뭐 이런 개떡같은 인생이 있어~ 싶더라~
차마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억울해도 너무 억울한...그런 기분 들었었지.
내가 눈물없는 인간인 줄 알지만...나...누구보다도 인정많고 맘 약하고
눈물이 많은 인간이라...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어,
너무 억울해서.
더이상 어떻게 열심히 살어~? 하고 도리질 했지만
그것도 일종의 응석이란 것을 나중에는 깨달았어.
마흔 중반이면 나도 그림도 그리고 여행도 하며
글도 쓰고 아이들과 우아하게 한번 살아 보리라며
그동안 개미허리 저리 가라하게 내핍하며 살았는데
그렇게 한번 살아 보지도 못하고
더 아득한 상황을 만난 그 기분.
재수없게도 사오정이니 하는 시대적인 상황까지 만나다니...
그런데...
삶, 참 재미있더라~
미리 계산해서 되어지는게 아닌...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내 안에서 일어 나더라고.
마흔 다섯살 대한민국 아줌마...
처음에는 내 인생 앞에서 두렵기도 하드라만
점점 더...겁이 없어 지더라고.
내 안에서 억울하다고 인생에다 삿대질을 한참 하고나니
맞장 뜨고 싶어 지더라고....
그때부터...용기가 점점 더 커져가기 시작하더라고...
누가 내 인생을 책임 져 주겠어~
나만 쳐다보는 저 동포들(가족들, 심지어 남편까지도)을 어이하라고...
조직안에서만 산 남편은 우물안 개구리,
현실감도 없고 팽 당한 처지라 기백도 없고...
큰 아이가 중3일 때...
매달 꼬박 꼬박 들어오던 월급이 딱 끊어졌다.
모성애+ 깡다구+
태백산정기<엄마가 날 낳을때 아들 낳게 해달라고 태백산 신령님께 치성 드려서 내가 태어남)
+ 한라산 정기(한라산 수호신 설문대 할망은 여신인지라)
온 천지신명의 기운이시여~~~
나를 도우소서~~~
스스로...마구마구 북 돋우며
눈물 콧물 훔치며...
호랑이 등에 올라 탄 기분으로
그렇게...10년을 달려 왔다.
한때는 우아부인 친구가 부럽기도 하고 샘도 났었다.
학교 다닐때는 나보다 공부도 못하더니(ㅎㅎㅎ...)
남편을 잘 만났나~ 자식도 잘 키우고
보란듯이 동창회에 나타나 눈을 아래로 깔고
우아부인 행세 하는것이 아더매치한 감정도 일더니
이 나이에 와 보니...
아...세상이 다 공평 하다고 느껴진다.
어떤 친구가 보석 주렁주렁 달고 나타나서리
너는 학교 다닐때 공부 잘하더니 지금도 잘 살고 있구나~
아이들도 엄마 닮아서 공부 잘 하제~~하고 칭찬처럼 말하는데
내 안에서는 이게 뭔 말이여~ 지금 나 약 올리는 말인겨~ 싶던 것은 자격지심이었다.
땟국물 줄줄 흐르는 후줄근한 노동복에다가
화장끼없는 맨 얼굴에 햇볕에 새까맣게 타서 영락없는 촌아지매를 보고
진심으로 칭찬하는건가? 아님 돌려 말하는가 싶었다.
그녀는 우리 친구들 모두가 공공연히 말하는
학교도 뒷문으로 들어와서
시집 잘 갔다고 소문난 친구였기에 그녀가 진심으로 말했어도
나는 곡해를 할 수 있는 인생역전의 처지가 된 탓이었다.
젊은 한때는 그런 것이 샘도 나고 부아도 치밀고 마음의 동요도 일더니
내 나이 오십을 넘기고 나니, 그것도 다 공평한 세상사라고 생각 되어진다.
내가 얼굴도 이쁘고, 공부도 잘하고, 집안도 좋고, 시집도 잘가서 잘 살고
자식새끼들 명문대 쑥쑥 가주고, 남편 출세하여 사모님 소리 듣고...
먹고 사는 걱정 하나도 안하고...
나도 사는데 쫒기지만 않았더라면 취미 즐기고
여행 즐기고 우아부인으로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내가 그 모든 복을 다 가지고 태어나면
그렇지못한 사람들 억울해서 어찌 살겠어~
어릴때 촉망받던 김영란이가 고생 지지리하는 것이
그대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고
그대를 위안하게도 해 줄 것이고
내가 쟤보다 더 잘살고 있제~하는 포만감을 줄테니
나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대에게는 위안이 되었다는 거에 만족하메~~
이 나이가 그런 나이가 되었으메...나도 감사한 인생이 되었지.
그래야 공평한 게 맞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이제 억울하지 않아~
내가 초년에 몸고생을 덜해서 중년에 다 감당한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공평하다고 생각 하네~
온 몸으로 달려보니 세상이 그리 두려워지지 않더라고.
그리고 내 나이...쉰 넷.
세상의 중심에서 큰 소리로 희망을 얘기해도 될 나이가 된 것이지.
나 스스로에게 칭찬하고 싶은 것은
그 어떤 순간에도 나는 긍정 마인드로 회귀하였고, 희망을 잃지 않았었지.
내가 받은 교육은 주입식 암기식 천편일률적인 교육이 많았어도
우리는 어긋나지 않고 올곧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 세대였어.
물질의 풍요는 부족했어도 정신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도록
절제하고 근면하는 것을 배운 세대였어.
물질을 채우지않고도 정신의 풍요로 더 행복해지는 법도 아는 세대이지.
그래서 비우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고
넘치지 않도록 절제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도 다행이다.
이 나이가 주는 평온이 참 좋다.
스스로를 알게 되었다.
허튼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딱 내 그릇만큼만 추구하게 된 것도
이 나이가 주는 깨달음이다.
이제 상농부로 거듭난 남편 이 성호씨에게
내가 그동안 메고 왔던 쟁기를 넘겨주려고 한다.
10년동안 내가 끌고 왔던 쟁기를 남편에게 넘겨 주어도 될 시점이다.
남편도 이제 농부로 우뚝 서는 시점이 되었다.
이제 김영란이 아닌
남편 이성호가 반디농장 주체가 되는 것이다.
.
.
.
그럼
난.
반디농장 힐링캠프를 만들 것이다.
오래 오래 내 안에서 싹 트고 있었던 꿈.
천천히
앞으로 10년동안 만들어 볼 것이다.
야생화 농장이 꿈이던 내 소망을
천천히~~~
걸어가 볼 꿈을 꾸고 있다.
이제 또 다른 왕무식 인생을 연출해 보는 꿈을 꾸고 있다.
친구야~그대와 함께 꽃길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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