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박 6일의 휴가 기간을 2박 3일 수다를 털어 놓으니
3박4일의 여유를 가지고 이 글을 읽어야 할것 같다.^^
먼 훗날 오늘의 시간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길 바라면서 기록한다.
휴가, 여행...그런 여유롭고 한가한 동기가 아니었으니
가출, 출가, 탈출...이렇게 이름 붙이는게 적합할 것 같다.
올 봄에 요양원에 들어가신 친정엄마때문에 봄 내내 맘이 옭죄이고 부대껴서
가슴앓이 하다가 겨울에도 안걸리던 감기를 두어달 호되게 앓았다.
곧바로 달려가서 보지를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서야 억지춘향 시간을 만들게 되었다.
엄마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때까지 방문을 자제하라는 요양원과 큰언니의 당부가 있기는 했지만
자식도리 못한다는 자괴감이 짓눌러서 맘이 늘 편치를 않았었다.
핑계는 엄마였고 휴식다운 휴식을 못 취하여 내 머릿속도 정리가 안되었고
제주도가 비행기 타고 한시간 거리이건만 마음뿐이지 훌쩍 떠나는 것이 쉽지가 않아서
만나고싶은 사람들도 떠난김에 만나자는 생각도 있었다.
내가 없어도 지구는 돌아간다는 사실과
내가 없어도 우리집도 돌아 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여
집밖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실상 내 스스로 나를 묶어둔 내 의식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
지천명의 나이에서 깨닫게 된 내 정체성(正體性)
남들 다 떠나는 휴가를 나라고 못 떠나겠나~
내가 정한 내휴가니 괜시리 민폐 끼치지는 말자며
미리 아무에게도 연락 취하지 않고 최소한의 옷가지만 챙겨서 무작정 떠났다.
아무도 날 묶어둔 이 없었는데 일상탈출이 이렇게 날가갈 기분일 줄....
엄마네 집을 가는 길에 만나볼 수 있는 사람들.
리무진 버스에서 가볍게 문자를 날려본다.
"오늘 바쁘니?"
대구공항에 내리니 대구에서 볼수있는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두사람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한사람이 비행기 떠나려는데 연락이 왔다.
영화관에 왔는데 공항에 도착하면 연락 하란다.
모처럼의 영화일텐데 싶어서 곧바로 안동으로 가리라 맘 먹고 공항에 내리는데
영화까지 포기하고 달려나온 영희씨.
영희씨는 지난해 7년만의 안식년 휴가를 제주도에서 1년을 보내고 돌아간 대학교수님 부부인데
두부부가 어찌나 소탈하고 유머러스한지 그들과 인연 지어져서 보낸 작년 시간이 꿈같이 생각된다.
영희씨랑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너무 재미있어서 일상을 다잊고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는데 그에게 홀려서(^^) 우리 모두 한동안 그가 떠나자
공허감이 밀물처럼 밀려와서 제주도가 마치 텅 빈 것 같았었다.
그와 함께 보낸 우리 멤버들이 그를 잊지 못하고 다시 제주도로 오라고 마구 손짓하는데
일상으로 복귀한 그들이 그렇게 다 팽개치고 온다는 것은 희망사항일 뿐.
영희씨도 내 맘을 헤아렸는지 모처럼의 가족영화시간을 반납하고
공항으로 달려나와서 우린 겨우 6개월이 흘렀을뿐인데도 이산가족 상봉한듯 넘치게 반가왔다.
우리들의 귀염둥이(^^) 분위기 메이커 영희씨는 여전했다.
그녀와 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꿈같이 흘러간다.
영희씨는 엔돌핀 제조기라서 함께하는 시간동안 내내 히히하하호호...
삶에서 속상했던 것 모두가 수다를 떨다보면 코믹으로 귀결된다.
대구에서 제일 잘한다는 집에서 육개장을 먹고 대구에서 가장 번화가란 곳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영희씨는 우리 아이들 예쁜 머리띠랑 핀도 사서 선물로 챙겨 주었다.
사양을 하면서도 끝내는 다 챙겨오는 이 아줌마가 늘 하는 말.
다 내복이지 뭐.ㅎㅎ...
영희씨... 나도 전생에 나라를 구한 징군 옆에 있던 운전병쯤 되는것 같지 않우?
공항에서 픽업하여 거하게 대접받고 다시 시외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니 칙사가 따로없다.
선생님 친구들은 개학시기이니 바쁘겠지하며 안동으로 향했다.
선생님네 <계하농원>
대구에서 안동으로 안동에서 봉화로 그렇게 가는 길이니
안동에서 보고싶은 사람들이 셋이나 떠오른다.
모두에게 문자를 날려본다.
고등학교 2학년때 담임 선생님이 작년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 퇴직하시고
봉정사입구에서 작은 농장을 하신다는데 꼭 가보고싶었었기에
문자를 날렸더니 곧바로 전화가 왔다."선생님, 저 지금 안동으로 가고있는 중인데 오늘 바쁘신지요?"
장거리 출타중이 아니시면 바쁘다고 못만난다고 하실 선생님이 아니시다.
안동양반에 교장선생님 체면까지 불구하고 퇴직전에는 학교에 계신 선생님들께 사발통문을 돌려서
내 귤을 단체구매까지 해 주셨던 선생님의 배려를 잊지 못한다.
바쁜게 뭐 있겠냐고 농장에서 기다리시겠단다.버스정류장까지 나와주시겠다는 것을
너무 황송하여 친구 만나서 가겠다고 했다.반디농장 개업(^^)하고
지금까지 최대주주가 되어 주었던 친구가 안동에서 농약사를 하고 있는데 아직 한번도 얼굴을 못 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농약사를 하고 있고 나는 친환경농사를 하고 있는데
그녀는 해마다 내 귤을 최고로 많이 팔아 주었다.물론 그녀가 화학농약만 취급하는게 아니고
종자와 친환경농자재도 취급하긴 하지만 나는 내 유기농 귤을 홍보 하려고
입을 뗄때마다 친환경농산물 운운하는데 어느날 그녀를 생각하니 눈치가 보였다.
앞으로도 내가 친환경 농사를 접을 생각이 없으니 그녀가 친환경농자재센터로 바꾸라고 넌즈시
그녀의 앞날까지 제시해주면서 우리의 재미있는 동반자관계를 이어가는 중인데
내 여고동창의 초등동창인 그녀를 난 아직 얼굴도 못 보았다.
나를 아낌없이 밀어준 친구덕분에 대책없이 농부로 전업했으니 앞으로도 날 먹여살려야한다고
생떼를 쓰는 나를 하나같이 사심없이 밀어주니 일복을 한탄하다가도 인복에 감사한다.
안동버스터미널에 나온 농약사 친구는 그녀 가게로 가서 그녀의 삶의 터전을 보여주고
선생님 농장까지 데려다 주었다.다들 바쁘게 사느라 시간 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배려는 특별한 배려라는 것을 안다.
선생님네 계하농원은 없는게 없었다.퇴직전에 이미 퇴직후를 생각해서 하나하나 준비하여
퇴직후에도 매일 출근하다시피하는 선생님 농장은 아기자기하면서도 알차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 모여 있었다.선생님 홈피에서 부러워했던 풍경이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선생님의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에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상회로 치면 만물상이다.온갖 유실수에, 온갖 동물에, 농장안에 있는 쉼터는 분위기 좋은 차실이었다.
누가 와도 반할만큼 아름답고 알토란같았다.
선생님께 인사도 제대로 않고(안동에서는 이런 인간 상놈이라고 상대도 안할 인간부류인데...^^)
농장풍경에 정신이 팔려서 군침을 질질...
토종닭, 흑염소, 거위, 기러기,벌꿀...아이구, 몸에 좋은 보신거리 다 모여있네.(이쁜 것들 보고 이런 생각이 먼저라니...)
마당에는 농사지은 태양초가 작은 비닐 하우스에서 마르고 있었고 표고버섯, 황금자두, 대봉감, 대추, 모과, 배...
야들아~(친구들아~) 이제 이곳으로 우리 휴가 오자~하고 전국방송 확성기로 마구 떠들고 싶었다.
이렇게 만들기까지 하루도 쉬지않고 꿀벌처럼 일하셨을 것을 알면서도
"어머머...너무 좋아...이거 다 내꺼야~"하는 심뽀가 마구 이글거렸다.
선생님께 해드린 것 하나도 없고 오히려 선생님을 귤장사로 전락케 만든 못난 제자임에도
스승님 은혜 하늘을 찌른다는 노랫가사처럼 내리사랑을 아끼지 않으시니
30년이 훨씬 지난 인연의 끈이 다시 이어졌음에 감사하고 감사하다.
선생님은 그 귀한 꿀을 내 친구와 나에게 한병씩 주시고 근처의 산채비빔밥 집에서 저녁까지 대접해 주셨다.
아예 벌통 하나에 제 이름 달게 해달라고 생떼를 쓰는 제자를 뿌리치지 못하신다는 것을 간파하여
내년에는 친구들을 떼거지로 모아서 꿀 뜰때쯤 계하농원에 진을 쳐볼까하는 궁리를 호시탐탐.
세상에서 요런 꿀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라는 것을 알기에...
이런 뻔순이 제자 두게 된것도 선생님 복이라예.ㅎㅎ....
이미 산그늘이 깊어지고 어둑해져 와서 선생님이 엄마네집까지 바래다 주시겠다는 것을
친구차로 안동에 나와서 버스타고 가겠다고 하였는데 버스정류소에 도착하니
금방 차가 출발한 직후라 한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다기에 농약사 친구가 또 봉화까지 데려다 준단다.
봉화에서도 또 20여분 달려가야 나오는 산골짜기에 엄마네 집이 있는데 가다보니
친구가 아예 엄마네집까지 데려다 주었다.그 밤중에 되돌아 갈것을 생각하니
미안하고 고마운맘 표현할 길 없는데 또 내 식으로 표현한다.
이런 친구 만난것도 다 니복이데이~하며 복타령으로 대신한다.
엄마네 집에는 큰언니가 미리와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 밤중에 거기까지 태워다 준
고마운 내 친구...혜경아~~~이제는 기약없이 갚는다는 말은 안한데이.
내가 이 빚을 갚을수 있는 날까지 내 곁에 있어줘~~~
만약에 내가 미처 못 갚으면 그것도 니 복이여~~~
(살아보니 주는 사람은 주기만 하고 받는 사람은 받기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드라.)
도산서원
안동에 들어서면 시내 전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구가 있다.
안동 간고등어의 간판들과 움직이는 광고판 버스에까지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라고 쓰여있다.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나는 그 문구에 잠시 숨이 멎을뻔했다.
웬지 차렷 자세로, 경건한 마음이 되어서, 덥다고 마구 풀어헤친 앞섭도 여미고
나사풀린 게슴한 눈초리도 단아하게 내리깔고 조신하게 행동해야만 할것 같은
나를 한마디로 제압하는 문구.
어쩌면 오만의 극치인듯 느껴지기도 하고, 어쩌면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기백인것 같기도 하고...
고리타분, 케케묵은 양반 의식이 싫다며 도리질을 하던 젊은 날
대처로 내달렸던 야생마같던 내게도
살아보니 뿌리, 근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록새록 느끼게 되었는데
그 뿌리를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이 문구 같았다.
정신문화의 수도... 아! 멋지다.
그 정신의 근간이 된 퇴계 이황 선생님의 도산서원을 다음날 찾았다.
아무리 세상이 요란하게 바뀌어도 하루 아침에 만들 수도 없고 흉내낼 수도 없는 기품있는 역사.
이 나이가 되어서야 느낄수 있게 된 그 깊이.
도산 서원은 구석구석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도산서원은 혜경씨 시누이인 영자씨가 안내하고 픽업해 주었다.
영자씨는 앞으로 서귀포에서 또 새로운 역사를 써 갈 인연이 되었다.
혜경씨에게 받은 은혜를 나는 영자씨에게 갚는 중이니
인연은 언제나 받은 사람에게로 돌려 주는 것만은 아닌것 같다.
내 이번 여행의 주 목적이 엄마를 만나는 것이라
다음날 큰언니와 근처에 사는 사촌오빠랑 엄마가 계신 요양원에를 찾았다.
집에 계실때는 언제나 동구밖을 내다보며 전국각지로 흩어져 사는 자식들이 언제나 올까하여
눈가가 짓무르셨을터이다.엄마 나이 84세. 그간 아버지 돌아 가시고 혼자서 기거를 하셨는데
산골살이 불편해도 온산천이 친구요 자유인으로 살다보니 내가 서울 살때도 오셨다가도
금방 내려 가시고 싶어 하셨다.엄마에게는 4녀1남의 자식이 있는데 나는 엄마의 넷째딸이며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다. 종갓집 맏며느리인 엄마가 내리 딸을 넷이나 낳았으니
맘고생이 여간했을 것은 다들 짐작이 갈 것이다. 그 넷째딸 나는 아들 점지해 달라고
태박산에 가서 치성을 드리고 나았다는데 원하는 아들이 아니라서 태어났을 때 죽으라고 윗목으로 밀어 두었다하는데
태백산신령님 치성으로 태어난 내가 그리 호락호락 명을 접었겠는가? 악착같이 살아남아서(ㅎㅎ...)
오늘날 한 인물은 못해도 어데가나 기백 하나는 살아있으니 딸이든 아들이든 치성 드릴 필요는 있는가 싶다.^^
그래도 4년후에 남동생을 본 덕에 나는 어린 날 막내딸로서의 사랑은 받고 자라서
손에 물 한방울 안 뭍히고 자랐는데(성질 까칠한 나는 종부집안 살림살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여자들 삶을 보고 난 그렇게 살지 않는다며 호언장담 했는데)
인생은 공평하다는 것을 이제사 깨달았다. 그때 안한 일까지 내가 지금 몽땅 다하고 있으니
세상사 그렇게 새옹지마인 것을 지천명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각설하고...엄마 이야기...
할아버지때는 떵떵 거리며 반경 수십리땅이 우리집 땅이었다는데
선비풍 아버지가 헛바람(?)든 사업에 올인하다보니
집안이 쪼그라드는 것은 순식간.내 어린날 의식속에 아버지는 제왕이었고 엄마는 언제나 무수리였다.
그런 불평등 관계는 양반동네에서 내려오던 한 풍습이었던지라 내가 공자왈 맹자왈 하는 풍습에
질려서 나도 모르게 반골기질이 생겨났었는데 요즘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남자는 하늘이다 당(남하당) 박영진과 여자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당 (여당당)김영희의 개그를 보노라면
과장되고 코믹하지만 그 일면을 재현하는 것 같아
그들 연기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특히나 박영진의 "건방지게...여자가 말이야~"하는 멘트는
우리들이 겪었던 그 풍습에 언제나 실존했던 핵심 요지였었기에
남존여비사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아온 나도 한역사의 산 증인이 된셈이다.
엄마의 삶이야말로 급변하는 이시대에 살아있는 유물이 된 역사인데
낀세대 우리들은 앞으로 우리들은 당연히 요양원에를 간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엄마의식과 우리들 의식으로는 아직까지도 부모님이 요양원에를 가는 것이 최악의 경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나도 엄마가 이제 혼자 계시기가 너무나 불편한 상황이라 요양원에를 가게되었다는 것이 못내 찔리고 부대끼었었다.
심지어 이번에 엄마를 만나보고 엄마가 요양원에 계시기 싫다면 나라도 모셔올까하는 생각까지 하고 나선 걸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내 엄마는 겉모습으로는 이제까지 엄마 일평생 가장 편안하게 살고 계셨다.
한평생 일을 하여 두꺼비등짝같던 손도 일을 안하니 고와졌고 언제나 삶을 꾸리느라 한시도 쉬지않던 부지런함에
안해도 될 일까지 쉬지않고 하는 일중독자가 되어 매일 일을 찾아서 하니
피부도 나는 원래가 새까만줄 알았는데 이번에 보니까 나보다 훨씬 뾰얗게 피어 올라서 곱게하고 앉아 계셨다.
내가 본 중에서 가장 고와진 모습이라고 엄마에게 말해주었다.
치매끼가 아주 살짝 있어서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계시니
간병인들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할머니라 하니 그동안 부대꼈던 마음이 일시에 사라졌다.
노래도 잘하고 농담도 잘 받아준다하니...역시 우리 엄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막내인 외동아들이 사업에 실패하여 객지로 떠난후에 오랫동안 보지못하여
가슴에 한으로 남아있지만...언제나 그 아들이 금의환향할 날만 기다리며 사시는데
나도 내 동생이 멀지않아 엄마를 찾을수 있는 여건이 되기만 기도한다.
이렇게 삶은 늘...애절한 부분을 안고 살아가기 마련인가부다.
그래도 내 맘에 뿌옇게 눈물을 자아내게하던 엄마의 존재가 아쉬운 부분 없지않지만
혼자 계시는 것보다 편안하고 안심할 수있는 요양원에 계시는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우리나라도 복지시설이 이정도까지 와서 살기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앞에 저수댐이 들어서서 배산임수가 된 엄마네 마을
송사리와 물잠자리가 사람을 무서워 않는 곳.
하늘아래 첫동네이던 엄마네 마을도 이렇게 변해 버렸다.
엄마네 집은 20여년 전에 아버지 사업실패와 건강악화로 심심산골로 들어 가셨는데
그때는 하늘아래 첫 동네 오지였었는데
몇년전서부터 도시사람들이 때묻지 않은 이곳으로 몰려 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계골마다 진을 치고 난리법석이 나버렸다.
오염 안된 곳을 찾아든 그들이 오염을 시키고 있으니 아쉽고 안타깝다.
있는 자의 자리가 오만하다.
좋다는 것은 다 연출해 놨지만 내 눈에는 아쉽기만하다.
돈만 있으면 그릴수 있는 이런 그림 이제 싫다.
낮은 자리로 있는듯 없는듯, 자연보다 튀지않게...
그러면서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그런 그림이 좋다.
산골이 산골이 아니다.
도시 사람들이 몰려와서 조용한 곳이 없었다.
별장, 민박...들이 즐비하였다.
또 한사람 꼭 만나보고픈 사람이 있었는데 속초에 사는 산들바람님.
이 친구는 블로그친구로 초창기부터 함께 왔는데 아직 한번도 얼굴을 못 보았다.
그녀는 서울에 있을때부터 철철이 강원도 특산물을 보내 주곤하더니
내가 제주도로 내려와서 귤농부가 되자 귤홍보대사를 자청할뿐 아니라
자신의 월급을 털어서 주변 사람들께 귤로서 인사를 하기에 바빴다.
내 귤을 하나라도 더 팔아주기위해 온갖 궁리를 다하는 것을 수년간 변함없이 해주는 것을 보고
내가 정말 인복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세상이 따뜻한 곳임을 더욱 느끼게 해주었고
힘들어도 그녀를 떠올리면 고맙고 감사한 마음에 더욱 잘해서 실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고구려의 사신도만 수호신이 있는게 아니라
내게도 수호천사들이 사방에서 포진하여 나를 보호하며 도와주고 있다고 그동안 큰소리 쳤던 것이
이런 친구들이 있었기에 그랬던 것이었다.
그리고...내가 귤농부로 제2의 인생을 정한 것도 이런 친구들 덕분이었다.
그동안 물심양면 도와주는 그 마음을 생각하니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내가 농부로 거듭나는 힘든 과정이 그냥 힘들기만 했던게 아니라 자신감까지 회복하게 해주었으니
나랑 이렇게 인연맺은 소중한 사람들께 보답하는 길은 내가 잘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에 이 친구도 다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속초가 멀긴하지만
제주도에서 일부러도 갈 판인데 봉화에서는 서너시간 거리라서 가리라 맘 먹었는데
예정에 없던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대구에 사는 사촌 오빠랑 작은 엄마가 엄마를 보러 오신다는 전갈에
내가 일부러도 뵈어야 할 사람들이 오시는데 자리를 피하는 것 같아서 속초의 산들바람님은
다음에 다시 보기로 미루고 사촌오빠와 사촌여동생네 식구,작은 엄마랑 다시 엄마가 계신 요양원으로 갔다.
작은엄마는 엄마의 두번째 동서인데 어린날은 우리집이 종가집이라서 명절때나 제사때면 언제나
만날수 있었는데 내가 집을 떠나고 시집을 가면서 친정일에는 손님방문하듯 하는 바람에 만난지가 오래 되었다.
둘째 작은 엄마는 엄마랑 나이는 동갑이지만 서열이 아래라서 깎듯이 엄마를 형님 대접 하였는데
백발의 할머니가 엄마앞에서 큰절을 하면서 안녕을 묻는 풍경을 보니 가슴이 찡했다.
김씨 가문에 시집와서 거의 60여년 세월을 함께 보냈으니 그 인연이 어디 평범한 인연이겠는가?
한 가문의 흥망성쇠를 다 함께 고락을 누린 할머니들이 어쩌면 이승에서는 다시는 못볼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더욱 애절한 상봉을 하는 것을 보니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우리보다 먼저 명퇴한 남편이
강원도에서 민박을 하는 찬례네 팬션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오크벨리 근처에 있는 <다래와 밤나무> 팬션을 몇년전에 오픈하였는데
나는 격려차 꼭 한번 방문한다 하여놓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번에는 반드시 보고오겠다고 작심하여
찬례가 주말이면 내려오기에 일부러 토요일까지 머물렀다가 들린 것이다.
우리보다 2년먼저 남편이 명퇴한 찬례는 내 여고동창인데 그간의 속사정을 다 아는터라
그 뒤를 따르는 내가 무슨 도움이 될까마는 그녀를 가슴깊이 이해한다는 명분으로 찾은 것이다.
우리 나이...인생 최고의 나이이기도 하지만
새로 출발하는 시점에서 만만치 않은 홍역을 치루어야 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찬례네가 먼저 명퇴를 하였고 그 사이 그녀가 겪은 숨가쁜 여정을 지켜 보면서
조마조마 하기도 하였고 잘 헤쳐 나가는 그녀를 보면서 가슴이 아리지만 뿌듯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아니면 그만큼 해낼 수가 있었을까.
초기 투자를 잘못하여 자금란에 시달리면서 40평 아파트를 팔고 전세로 갔다가 다시 월세로...
그리고 그사이 두딸이 대학생이 되었고...팬션이 자리잡을동안
찬례는 직장을 다니면서 금요일 오후에는 팬션으로 달려 갔다.
그렇게 하루도 쉬지 못하고 오년을 하루같이 달리고나니 이제 조금 자리를 잡았는가 싶단다.
그녀는 그사이 과로로 병원에 입원도 하였였고 부족한 자금으로 팬션을 꾸려가고 자리잡기까지
하얀밤을 수없이 지새웠을텐데도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봤기에 애틋하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삶이 치열하고 뜨거운데 어찌 내 삶만 힘들다고 투정을 하겠나.
그 사이 나도 뒤를 이어 명퇴자의 아내가 되어 공중 널뛰기 곡예를 하게 되었으니
동병상련으로 누구보다도 내가 그녀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찬례야, 아직 끝나지 않은 마라톤이지만 그동안도 잘해왔고 당연히 앞으로도 잘해낼거야.
우리 서로 화이팅이데이~
오는날 계하농원에서 선생님을 만나고 있는중에 생각지도 않게
대전에서 정관장 홍삼 대리점을 하는 홍란이가 전화를 했다.
홍란이는 담배인삼공사에 다니다가 퇴직하여 정관장 대리점을 하는데
홍란이도 작년에 남편이 명퇴하여 마음이 심란하다하였는데 마침 선생님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전화가 와서 주말에 찬례네 팬션으로 오라고 하니 그러마고 하였다.
홍란이는 두 아들 모두 개강을 앞두고 원룸을 얻어서 이사를 해주어야해서 잠깐 난색을 표하길래
무대뽀 내가 "시끄럽데이, 보고 싶으니 무조건 와야해."그랬더니
밤길에 장거리 운전으로 달려와 주었다. 이러지 않으면 우리 모두 만나기가 어려운지라...
생각지도 않게 친구들이 여러명 모이게 되니
대구에서 바쁠가봐 문자만 날리고 못 만나고 올라온 은영이에게 전화를 하였다.
중학교 선생님인 은영이가 마침 개학이 화요일이라하며 내가 왔으니 오겠다고 흔쾌히 말해주니
예정에 없던 작은 여고동창회가 되게 생겼다.
은영이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다시 만난 것이 내 나이 40이던 십년전.
그녀는 중학교 수학 선생님으로, 나는 명함하나 내밀게 없는 그냥 가정주부로 만났는데
그때 남편회사 중간 퇴직금이 나와서 생활비에 조금 보텔까하고 주식에 투자했다가 몽땅 다 날리고
마음이 피폐해 있었을 때 그녀를 만났었다.그 이후 내 삶이 바람을 심하게 타고
제주도에 와서 귤농부가 되기까지 내내 함께 해 오며 내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어준 친구이다.
그녀 인생역정 역시 또순이중에 상또순이로 요즘 우스개소리로 가장 부러워하는 계층,
우리들이 준재벌이라 부르는 부부 선생님이다.
그녀는 결혼하여 남편을 군대 보내고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남편을 영문학박사까지 만든
사막에 떨구어 놓아도 살아남을 종족에 족보를 올린 대한민국 또순이 아줌마이기도한데
전혀 선생님티를 내지않고 어딜 가나 없는듯 있다가 좌중을 제압하는 은근한 카리스마의 여왕이다.
아쉬울게 하나도 없는 선생님인 그녀도 날 만난 이유로 겨울에는 귤장수로 종횡무진하게 되었으니
내 곁의 많은 사람들이 반디농장을 돕지않으면 않될것 같은 사명감에 사로잡혀
나를 도와주는 바람에 나는 귤농부로 살아갈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것을 행복한 비명이라고 하나?^^
홍란이는 대전에서 은영이는 대구에서
몇시간을 달려서 찬례네 팬션에 모이니까 이게 몇년만인지...
혈기왕성하던 40대 초반, 그때만해도 치기가 넘치던 시절이었는데
은영이와 내가 작당(^^)을 하여 네분 은사님까지 모시고 우리는 여고동창회란 것을 해 보았었다.
교육장 선생님 빽으로 학생 아영장까지 빌려서 꿈에 그리던 1박2일 동창회를 했었는데
그 후 모두들 너무나 바쁜 시기들이었어서 다시 모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사실은 제주도로 줄행랑을 치고 더이상 주체가 될수없다고 오리발을 내민 나때문에
그 후 다시 모임을 할수가 없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작은 모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은영이가 말했다, 나만 움직이면 된다고...
에궁...나도 그 사이 만만치 않은 세월이었어.
하지만...이젠...다시 모여도 시간을 내 볼수는 있을 것 같아.
내가 없어도 지구가 돌아 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까...
이제 때가 온걸까?
그런데 이제보니 내가 농삼아 "전국에 지사가 몇개인데..." 대구지사, 대전지사,수원지사, 안동지사...
내 맘대로 정한 전국망 지사장들의 회동이 되야부렀네.ㅎㅎ....
다음에는 서울지사장님들를 만나러 상경해야겠네.ㅎㅎ....
오십살 소녀들.
마음은 열입곱 그때이건만 그 사이 세월이 삼십년이 넘게 흘렀다.
모두가 자신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고 있고
이해타산없이 반갑기만 한 여학교 친구들.
귤농부가 된 나를 위해 겨울이면 때아닌 귤장수로, 귤홍보대사로 기꺼이 변신해 주는 한없이 고마운 친구들.
계산없이 주는 마음을 헤아리니 세상이 따뜻한 곳이란 것을 느끼게 해주는
나의 든든한 빽그라운드 내 친구들.
내가 무엇으로 그 마음을 갚을 수가 있을까.
내가 잘 살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
꿈을 꾸며, 이루기위해 날개를 가다듬고
팽귄이 날아가듯 나도 비상해 보려고 한다.
며칠간의 휴가가 내게 생각의 날개를 달아 주니 마음이 구름처럼 가벼워졌다.
비워진 머리에 다시금 새 물이 차올랐다.휴식의 위력이다.
돌아와서 다음날(8.23) 나는 오십세 생일을 맞았다.
그동안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불분명한듯 살아온게 아니었나 싶어서
이제 오십해 생일을 계기로 나를 다시금 리모델링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첫번째 행한 것이 오직 나를 위해,
마블이 잘 배긴 꽃등심으로 점심을 먹었다.
작은 돈은 벌벌 떨며 아끼다가 큰돈은 성큼 주식으로 날려 버리는 우매함을 떨치고
이제부터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소중하다고 매일 나에게 각인해야지.
지금 내 앞의 시간이 가장 귀한 기회라는 것을 늘 떠올려야지.
살아있음, 그 자체가 매일매일 축제의 이유가 될수 있도록....
2010.8.26
이번에 제주도로 이사시킨 것은
계하농원 채송화와 다래와밤나무 은방울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