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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백만년만의 여행(친정가족 나들이)

by 농부김영란 2017. 11. 2.


절정의 가을 10월이 다 가도록 글 한편 못 올리고 가을을 다 보냈다.

늘 바쁜 척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영양가있게 보내지도 못하면서

시간은 날개를 달고 날아갔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이제 잠깐이라도...

스스로 침잠하여 자신을 들여다 보아야겠다.



들뜨지 않고 나다워지는 시간을 나에게 주문해 본다.

나를 들여다 보아야 일관되게 살 수 있어서이다.

성찰없이 들떠서 보낸 시간들이  멀미가 오려고 하는 시점.

멈춰~ 하고 자신에게 명령했다.



" 영란! 너 누구지 ?"

" 너답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이지? "



우직하게. 바보처럼,고지식하게, 타협없이...

그렇게 유기농농부 생활을 13년을 넘겼는데

지난해는 유난히 힘들었었다.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늘 뻐근한 지상과제인데

세 아이가  학업중에 있으니 그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



나는 늘,내 무게를 가지고 남들도 가늠해 본다.

너도 많이 힘들었겠구나~~~

한동안 소식이 없는 너도  너의 무게를 삭혀 내느라고

버티고 이겨내느라고, 침묵을 택한건 아닌지...

살아내는 것 자체가 버라이어티쇼를 연출하는 것 같다.




10월에 역사적인 일 한가지를 해냈다.^^

친정형제자매들간의 2박 3일간의 여행을 무사히(^^) 치뤘다.

남들은 뭉쳐서 여행도 가고,정을 주고 받으며 화기애애 하는데

나는 왜 친정식구들과의 여행에 "역사적" "무사히~" 이런 단어를 쓰는가?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이가 되니 " 이것이 삶이다~" 하는 생각이 들고,

지지고, 볶고, 엎어지고, 나뒹굴고,혼비백산하고,상처투성이가 된 모습을

담담히 말하고 풀어 낼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 

전에는 보여지는 것에 치중해서 치부는 숨기고 가리고,

자랑질할 것만 보여 주려고 하였지만

삶이 어디 그렇게 우아하기만 하더냐~

꿈을 쫒아서 마구 내딛다가 내팽겨쳐지고,추락하고, 곤두박질치고, 심지어 죽음의 문 앞까지 갔다가 살아난

형제자매들과의 행복한 여행은 언감생심이었었다.

만나면 다툼이 일어나고,다시는 만나지 말자며 도리질 하고...

구심점이 없어서 엉킨 실타레를 풀 수가 없었었다.

함께 동업하다가 둘다 망하고 그 앙금이 남아서 만나면 다시 화풀이 하고...

그러니 화합을 하고 싶어도 늘 배가 산으로 가곤 하였다.



친정이 경제적으로 지하3층으로 떨어지고나니

그 후세들도 다들 경제적 곤궁에서 헤어나오려고 발버둥 치다가 악순환이 오래 계속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노동을 경시했던 집안 풍조가

땀 흘려 일하는 삶을 지향하지 않은 댓가라고 나는 늘 비판했고,

나는 그래서 몸을 쓰면서 일하는 삶을 택했다.

친정을 생각만 하면 한숨이 나오곤 했다.

많지도 않은 형제 자매들이 모여서 여행도 가고

살아있음에 감사하고,분수를 알고 자족하고 그러고 싶었지만

어리석은 감정들이 언제나 먼저와서 마음을 뒤흔들어서

화합이 요원한 듯 했다.




그런데 뒤엉킨 감정의 실타레도 알고 보면 헛된 탐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한다면

해법은 참으로 간단한 것이었다. 

마음 하나 바꿔 먹으면 되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 마음 하나 바꾸기가 어려워서 늘 아웅다웅하게 된다.




우리 부모님은 다섯 자녀를 두셨다.

딸 넷에 아들 하나...

종손집 맏 종부가 딸을 내리 셋을 낳고 보니 부디 아들 하나 점지해달라고

태백산신령님께 치성을 드리고 낳은 자식이 또 딸, 바로 나 넷째 딸이었다.

넷째딸을 낳고 보니 엄마는 산모로서 누워 있기도 민망해 바로 일하러 나가셨다나~

아가는 죽든지 말든지 윗목으로 돌려 놓고...

내가 태어 났을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 가신 때이니

아마도 남편과 삼촌들께 죄스러워서였을테지.

"그런데...왜...딸만 낳은게 엄마 죄지? "

반골기질의 난 지금도 지하에 계신 아부지께 따져보고 싶다.^^

(그래서 난 세 딸의 엄마가 되어서도 일부러 더 당당 했었다^^

지금은 딸 셋이라고 부러워하는 세상이네~격세지감이여~^^)




그리고 4년이 지나서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 오셨다~^^(그 분이 오셨네~^^)

우리집 아들은 용알이라고 불려지며 보호막 아래서 지극한 보호를 받으며 성장 하셨다.

60년대 어려운 시절에도 우리집 귀한 아들은 좋다는 것은 다 먹이며 온실의 화초로 자랐는데

내가 고등학고 시절에 우리집은 아부지의 사업이 또 한번 곤두박질 치며 추락하여서

귀한 아들도 덩달아 세상의 쓴 맛을 보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언제나 들러리였고 모든 사람들은 막내 아들을 도우라는 지상명령이 떨어졌다.

 막내 동생은 법대 졸업하고 사법고시 1차는  패스 했는데  계속 도전안하고

대기업기획실에 취직했다가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 들었다가

인생의 쓴맛을 한꺼번에 보았었다.

세상이 그리 만만한 줄 알고 덤비다가 쌍코피가 터져서

온실의 화초는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며 다시 환생했다.

동생은 지금 지팡이를 짚고 부축 받으며 걷는다.

(반신불수가 되어 재기 했다~)

파란만장의 길을 지나와서 그 동생이 지난해는 다시 공부해서 식품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임용까지 받아서 꿈이냐~ 생시냐~ 하며 우리가 축하해줬다.

순탄한 길에서 받은 훈장이면 그리 감격했겠나만 온갖 고난을 지나와서

이제는 머리가 백발이 되어 얻은 훈장이라 나도 해묵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이것이 인생이다.




가족사를 다 말하자면 책 서너권은 족히 나올 비화가 축적 되었어서

간단히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두가 다 지하 3층까지 추락 했다가

이제사 지상의 햇빛 구경을 하게 됐다라고 나는 표현하곤 한다.

큰언니는 전재산을 털어서 건물을 짓다가 한꺼번에 다 날릴 처지가 되어(이것도 사연이 구구절절)

홧병으로 간에 쓸개즙이 덮어서 죽어도 좋다는 각서를 쓰고 연구실험용으로

2년간의 병원 생활을 하고 다시 지상의 세계로 돌아왔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고3일때 병원에 입원 했었는데

그 아들 생각하니 결코 죽을 수가 없었단다.

 그 아들은 S대를 지망했으나 엄마의 입원으로 공부를 제대로 못해서

몇년 후 차선의 S대(성대)를 갔는데 지금도 안타까와 한다.

그때 내가 함께 조카랑 생활 했는데 그 조카는 이모인 나를 안타까와서

이번에 술 한잔 먹고 나를 보고 아깝다고 눈물을 흘렸다..

그 조카가 50살이 다 되가는데 우린 함께 늙어 가면서 청춘에 이루지 못한 꿈을 아직도 서로 안타까와 한다.

그런데 나는 이제는 미련이 없다.

" 인생은 다 거기서 거기여~"  나는 지금 농부의 삶이 내게 가장 맞는 것 같다.

늘 자연과 함께 하는게 내 정서거든.이렇게 진정으로 말해 줄 수가 있었다.

" 넌 정말 아깝다~~

지금이라도 다시 공부 해 보는게 어때? "

이제와서도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건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서인데

인생 이만큼 살아보니...공부는 학교에서만 하는게 아니고 살면서 하는거였어.

가장 훌륭한 공부는 지혜로와 지는 건데 평생 살아도 잘 안되는 거더라고.

여기까지 살아보니 성격이 운명을 만든다는 생각이 드네.

이것이 인생이다.





둘째언니는 우리집에서 가장 혜택을 못 보았다고 억울해했다.

아부지가 광산을 하실때 갱도가 무너져서 인명사고가 발생하는 일이 생겼다.

집안에 큰 우환이 생겨서 정신이 없을때 언니가 중학교를 가야 하는데 입학원서를 못내고 말았다.

학벌에 대한 한이 얼마나 깊었는지 그 후 언니는 검정고시를 해서 대학의 큐레이터학과까지 가고

재주가 있던 그림에 도전해서 나름 자존심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 세월이 피눈물나는 노력의 세월이 있었을 것이다.

온갖 고난을 뚫고 어느정도 성취한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내가 너 정도의 형편만 되었으면 하늘의 별이라도 땄을거다.

(초등 학벌의 사람이 대졸 학벌의 사람에게 하는 말~)

그런데 과연 그럴까?

어느 정도 살고보면 거의 평준화가 되어 있는게 인생이더라~

등 따시고 배 부른 사람들은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야 할 필요를 그리 느끼지 못하니

여유를 부리고 낭비를 하다가  고만 고만하게 살게 되고

가난해서, 없어서 못 배운 사람들은 그 결핍감에 헝그리정신으로 치열하게 살아내서

인생반전을 이룬 예가 주변에 수두룩한 것을 보면

"인생은 공평한거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이것이 인생이다.




셋째언니는 천성이 천사다.

아무리 말려도 끊임없이 주는 형이다.

요란하지 않고 무던하고,옆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성격인데

언니가 집을 떠나자 우리집이 가세가 폭망했다고 언니가 복덩이인가부다라는 소리를 어른들이 했었다.

까칠한 성격의 내가 셋째언니가 너무 착해서 탈이라고 성토해도 어찌 착한게 잘못이겠는가?

 늘 제 실속을 못 차리고 다 퍼주는 성격이라서 말려도 안된다.

어쩌면 그것이 보이지 않는 복이 되어 언니를 지켜주는지도 모르지만.

이 착한 언니는 첫사랑을 이루지 못하여(여러가지 여건으로) 애닲아 했다가

일본의 제일교포로부터 선이 들어오자 멀리로 시집을 갔다.

착한언니는 형부와 금슬이 좋았는데 그 형부가 건강이 약해서 몇년을 병원에 계시다가 7년전에 돌아 가셨다.

 언니가 미망인이 되어 세딸을 거두며 열심히 살다가

이번에 둘째 사위를 맞고 손자까지 생겨서 인사 시키러 나왔다.

슬픔을 안으로 삭힌 언니의 얼굴에 수심이 서려있는 것을 보면 늘 가슴이 아렸다.

그래도 세월이 약이다.

언니와 세딸들과 사위와 손자까지 데리고 나와서 인사하니

이제는 언니가 더이상 슬프지 않겠구나~싶었다.

방긋방긋 웃는 아가가 생기니 시름이 웃음으로 바뀔거다.

이것이 인생이다.




내겐 어떤 고난이 있었나?

나의 헝그리 정신은 어떤 것이었나?

내게도 책 서너권의 우여곡절이 함께 했지만 돌아보니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스물여섯에 폐결핵이 걸렸던 사건인 것 같다.

도저히 나의 현실에서 매몰될 수 없다며 다시 공부를 하여 갔던 학교.

기술이 있어야겠다며 차선의 방법으로 갔던 학교.

과수석으로 장학금 받게 되어 간 학교였는데 두건의 알바로 생활비를 벌며 다니느라 기가 넘어섰나부다.

감기인 줄 알았던 기침이 심하고 오래 되어 병원에 가니 폐결핵 3기.

막막했다, 기댈 곳도 없는데....

다시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삶을 마주하고 나는 내 인생과 담판을 짓게 되었다.

기댈 곳이 없으면...내 힘으로 스스로 서는 방법밖에 없지 않은가?

그냥 go !!!!

패결핵은 약을 먹으면 전파(남에게 전파하는)가 되지 않는다해서

약을 먹으며 일상을 그대로 진행했다.

학교도 그대로 갔고 알바도 그대로 했다.

매일 11알의 약을 아침 식전 먹어야 했고(9개월을)

매일 주사를 6개월간 맞아야 했는데 매일 병원을 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

친구에게 주사 놓는 법을 배워서 내 엉덩이에 내가 주사를 놓았다.

매일 주사를 맞으니 엉덩이 살이 딱딱해져서 양쪽으로 번갈아 가면서 맞았는데

나중에는 딱딱해져서 주사 놓기가 힘들었었다.

내 인생을 어디에, 누구에게 응석을 부릴 것인가?

이 상황을 알면 엄마가  땅을 치고 통곡을  할것 같아서 집에도 알리지 않았다.

내 곁의 누구에게도 내가 폐결핵이 걸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9개월을 약을 먹고 6개월을 주사를 맞고나자 12월 , 바로 취업시즌이었다.

요식업계에 필요한 보건증을 만들기위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완쾌!!!!

약에 취해서 휘청거리면서 걸으며 내가 기댈 곳은 그냥 내 맘속의 신께 기도했다.

"나를 어여삐 여기셔서 다시 쓰시려거든 낫게 해 주세요~"

완쾌 판정을 받고 나는 신이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이후도 종종 은총의 손길을 느끼곤 했는데도 난 여전히 나이롱 신자이다.

어떤 요식적인 행위보다도(보여지는 것) 삶에서 종교인다운 태도가 우선이라고 늘 변명하며...

이후...나는...단순하게 생각하고...무식하게(저돌적으로)...살기로 내게 주문했다.

틀에 갇힌 나를 뛰어넘는 주문을 늘 하게 된다.

이것이 인생이다.





그 모든 우여곡절의 삶.

그것이 모두 인생의 단면이라는 것을 이제사 느낀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않고, 당당하게 내 삶을 사는 일이라면 그 어떤 삶도 숭고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제사...질곡의 가족사도 담담하게 풀어낼 수가 있게 되었다.

아직도 가족들이 만나서 과거로 회귀하여 감정풀이를 할라치면...

" 내 앞에서 그런 말 하지마~~~

내가 농부가 되니까 로망으로 보이지만 농부야말로 노동자의 대명사야."

어린 날은 공부 잘 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대단한 인물이나 되는 줄 자만 했지만

진짜 대단한 사람들은 가장 열악한 상황에서 자신을 이겨내고  꽃을 피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 여행은 오사까에 사는 셋째 언니가 사위와 손주를 데리고 인사 나온다해서 시작됐다.

좋은 일로 만나게 되니 시간이 되는 사람은 만나자고 파발을 띄우는 것은 넷째인 내몫이었다.

시간이 되는 사람은 모이세요~~이제는 그렇게 말한다.

의무감, 책임, 이런거는 갖지 말자.그러면 무거워진다.

그냥 형편되는대로, 무리하지 말고,마음 가는대로 그렇게 하자고.

그동안 모든 반목의 단초는 책임, 의무, 바램, 주장...이런 것들이었으니

이제는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서 마음이 시키는대로, 형편이 되는대로, 가볍게, 기쁘게...

 나이 순서대로  가는 법도 아니고, 이만큼이라도 살아온 게 감사하니

우리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있으니...모이시라~~~

넷째인 나는 이제는 무소불위의 마음이 되어

(쓰잘데없는 소리 다 수렴하다보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을 늘 보아왔기에~)

구구절절 과거의 소릴 하면 "시끄러~"하고  잘라 버렸다.

과거로 돌아가면 쌓인 회한 다 풀어 낼라고 울고 불고 또 배가 산으로 갈터이니

지나간 것은 다 잊고 오직 현재와 미래만 생각하자.

먼 미래도 모를 일이니 가까운 미래만 계획하고...부질없는 탐심은 절대로 안돼~~~

74살 큰언니조차 57세 넷째가 윽박 지르는 장유유서가 거꾸로 서게 된 세월.

오직 화합과 감사만 공유하자~가 내가 주장하는거다.

이 여행에 80세의 작은 엄마까지 가세했지만

70대 80대는 낑가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하시공..하면서 다독이고

(농담삼아, "늙으면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는 말을 인용하며...

그동안은 지갑은 닫고 입은 계속 열려고 해서 화합을 저해한터라~~^^)

둘째와 막내의 해묵은 감정도 무마하고

나는 우리 가족의 대역사인 탕평을 실현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갈망하던 친정자매들과의 여행을 웃으며 마무리 지었다~

오즉하면 내가 백만년만의 여행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그리고...모두 공평하게..회비도 내시고...

그래야 서로 당당해지는거다.

이 정도 회비 내는 것은 더 열심히 살아서 모아서 우리 해마다 다시 만나자~~~




이제사~~~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 하실꼬~~~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이제사 삶에서 겸손해지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소박하게 살고, 부지런하게 살고,마음 나누며 살겠습니다.

그동안 부모님께 많이 죄송한 삶이었습니다.

(휴~ 오랫만에 3박 4일 썼네..ㅎㅎㅎ...)




우리 살아 있음을 축복하며....천안 조카네 식당에서












아직도 요리는 요자도 모르는 조카가

대학생벤처 창업했다가 무지 고생하고

현금 장사가 최고라는 선배조언에 요리 안해도 되는 식당 조개구이집을 차렸다가

경영학도답게 10년 세월 말아먹지 않고 변신을 거듭해 온

온갖 종류를 다 구워먹는 식당 그릴온.

우리 식구들이 다 모인다고 킹크랩에 랍스터까지 준비했다.

동화야~~잘 살아 주어서 고맙다.












다음날 우리는 부모님 산소에 갔다.

가슴이 먹먹...








꽃 좋아하는 엄마가 꽃으로 피었나...

달맞이꽃 한송이가 웃고 있었다.






셋째언니가 경주 문무왕릉을 보고 싶다고 해서

동해안으로 해서 경주로 가기로 여정을 짜고 가는 길에

시냇물이 보여서 우리는 어릴때 잡던 골뱅이를 떠올리며 개울가로 내려 갔다.

골뱅이는 없고 달팽이들이 옹기종기.





수풀 헤집고 내려오다가 도깨비풀이 붙어서 떼느라고 혼났다.





2박3일 우리를 태우고 다닌 차.





동해안에 가서 우리 영덕대게 먹어보자~~~

그래서 찾아간 맛집.

동생이 추천받아 간 집인데 대게집 다 지나가서 끄트머리에 한적히 있는 집인데

우리 모두 만족했다.

대게는 비싸서 우린 홍게로 선택했는데

살아있는 홍게는 대게 못지않게 알차고 맛있었다.








홍게찜이 맛있어서 젊은 사장님도 소개한다.

택배도 해준다고 한다.상호는 위의 사진 검색하면 나온다.(205 대게 직판장)









특히나 나는 "오~ 즐거워라~"를 연발하며 마지막까지 알차게 다 발라 먹고 배를 두드렸다.




영덕에서 홍게를 배를 채우고

우리는 경주를 가는 도중에 포항 호미곶을 보고 가기로 했다.

포항은 오직 호미곶 하나만 보고 지나갔다.

대한민국 지도의 호랑이 꼬리 지점.

그날은 태풍이 일본으로 지나가는 날이라서 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너울파도가 바다를 뒤집고 있었다.

하늘과 파도와 바람이 한색이 되어 우리가 살면서 겪었던 시련들처럼 위협스런 분위기였지만

공포라기보다는 어떤 기상의 표출로 느껴졌다.

가장 기상이 모인 곳에 손조각상을 세운 듯 싶게 손조각상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경주의 문무왕릉(수중왕릉)을 향해 갔는데

이미 날이 어둑해져서 사진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셋째언니는 어디서 봤는지 원효대사의 책에 보면 "수중의 문무왕릉이 땅으로 솟아 오르고

일본은 거의 가라앉고, 우리나라는 솟아 올라서 아시아의 중심이 된다."

 했다고 하는 소리를 하면서 문무왕릉을 가보고 싶다고 하여서

우린 언니의 주술적인 사고에 코웃음을 치면서도

언니가 보고 싶어하니 문무왕수중릉을 보러 갔다.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어서 한민족의 힘을 합치면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북한이든 남한이든 우리민족이 보통 인간들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데

부디 비극적인 충돌이 없이 화합으로 우리나라가 중심이 될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경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우린 요즘 핫한 핑크뮬리를 보러 갔다.(내가 추천)

모두가 경주는 몇번이나 와 봤다고 하니

안 본 것을 보러 가자며 내가 이끈 곳.

첨성대 앞의 핑크뮬리(분홍색 서양갈대)

옛것은 지키고 새로운 것은 즐기자~

핑크뮬리는  요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사진 찍기에는 참 좋았다.

첨성대도 배경이 되고 연두색 왕릉도 배경이 되어서

예쁜 사진이 나오는 풍경이었다.





















그날 저녁이 작은 아버지 제사인지라 우리는 핑크뮬리만 보고 다시 영양으로 향했다.

작은 아버지 제사까지 다 함께 지내게 되어 그동안 못했던 많은 것을 한꺼번에 다 하게된 이번 여행이었다.

모두가 해마다 이렇게 만나서 여행 하자고 하는 것을 보니

오래동안 모두가 얼마나 갈망했던 일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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