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신문사에서 문화관광부지원 기획취재로
음식테마거리 취재를 4박 5일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시민기자로 동승을 하겠다는 의사를 표하여 함께 다녀왔다.
귀농일기를 쓰는 시민기자지만 전직(요리사)을 우려 먹으며 조언을 하겠다는 명분이 있었으나
책임이 따르는 것은 아니라서 마음 홀가분하게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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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갱년기가 찾아왔다.
몸과 마음이 부대끼는 것을 시시때때 느끼곤 한다.
내 주변 현상은 모두 그대로인데 내 시선이 각도가 기울더니
어제까지 감사하던 삶이 갑자기 내 삶이 억울하다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사춘기 외계인 딸과 사추기 지구인 엄마와
조선시대 남편이 공존하는 한 공간이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한 하운 님의 시처럼
내게 찾아온 갱년기, 사추기의 심정.
침몰하지 않으려면 혹성 탈출하라~~~
내 안의 소리가 비상구를 찾으라는 수신호를 마구 보내고 있었다.
충전이 필요했다.
샘물을 마시고 싶었다.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50평생 처음으로 홀가분하게 떠난 여행.
뒤를 돌아 보고, 오늘을 보고, 그리고 미래를 꿈꾸고 돌아왔다.
10대:책들을 읽으며 내 사춘기를 달랬었다.
그 시기에 읽은 책이 지금까지 내 독서량의 90%였던 것 같다. 한 가문이 추락하는 것을 고스란히 몸으로 부딪히게 되었다. 엄마의 딸인 나는 아부지의 사랑은 욕망이라며 아부지와의 소통을 끊어 버렸다. 아직도 그 상흔이 아스라히 남아있다. 아부지에게는 사랑이었겠지만 우리 가족에겐 고통의 씨앗이었다. 그 후...오랫동안...삶의 바닥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나는 남녀간의 사랑에대해 엄격한 마음이 생겼다. 중풍이 걸리자 집으로 돌아온 아부지를 엄마는 받아 들이고 병수발을 하며 아부지는 조강지처의 사랑이 진짜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고 돌아 가셨다. 나는 절대로 그리할 수 없을것 같다. 20대:홀로서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었다. 책과 관념에 사로잡힌 내가 만난 현실. 보호막이 없이 좌충우돌하며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용기를 다져야 했다. 꽃같은 나이 26세 겨울,가난한 고학생이 폐결핵에 걸려 버렸다. 하얀 벽을 마주하고 삶과 단판을 지었다. 죽고 사는 것이 운명이라면 멈추지도 말고, 기대지도 말고 내 힘으로 걸어가 보기로 했다. 한번에 삼킬 수 없는 한웅큼의 알약을 삼키고 길을 가면 약에 취해 길이 춤을 추었다. 그 약을 하루도 빼지않고 10개월을 먹고 6개월을 매일 엉덩이에 주사를 맞았다. 매일 병원을 갈수가 없어서 나중에는 내 손으로 직접 주사를 놓았는데 엉덩이가 딱딱해져서 주사바늘이 들어가지를 않았다. 의사선생님과 간호사친구 한명밖에 내가 폐결핵이 걸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했고 마음을 닫고 살았다. 그러고도 학교를 다니고, 과외를 두탕하고, 저녁에는 카페에서 캐셔를 보는 알바를 하였었다. 내 청춘이 온통 아프고 멍들었지만 꿈을 꾸었기에 의기소침하지는 않았었다. 30대:서른둘 2월에 결혼을 했다. 무엇이 되어 보겠다고 치열하게 산듯해도 별 뾰족한 수가 없을것 같았다.20대를 너무 내몰아서였는지 휴식을 취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결혼을 휴식으로 생각할만큼 내 삶이 부대꼈던가부다.아니 내 기질이 한몫 한 것 같다. 과하게 내달리는 내 기질때문에,그리고 생각만 너무 많이 하는 우유부단함을 떨치려고 <단순 무식하게 살자>로 삶의 방향을 정해 버렸다. 내 예민한 신경줄이 나의 환경을 소화하기에 너무나 걸림돌이 되었기에 잔가지의 생각은 무조건 가지치기 하기로 하였다. 아이 셋을 무식하게 배를 가르고 낳는 무모함의 극치를 연출하며 살았다. 서른둘, 서른 넷, 서른 여덟, 마흔... 이렇게 네번의 전신마취를 하고 배를 가른 무식한 여자가 되었다. 그리고 내 몸이 고꾸라지는 경험을 하였다. 내 안의 기를 다 써버리고 방전된 것 같았다. 아직 어린 내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큰 언니에게 내 아이들을 부탁하였다. 무모하게 내 삶의 에너지를 남발한 댓가를 치루면서 아이들때문에라도 일어서야만 했다. 세살 막내는 기운없이 누워있는 엄마때문에 누워서 젖을 먹어서 젖니가 다 상해 버렸다.어미로서의 모성본능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일곱살때 친엄마와 사별한 내 남편이, 살면서 내내 결핍된 것을 많이 느꼈어도 엄마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다스려 올수가 있었던 것도 내 안의 모성본능 때문이었다. 40대:샐러리맨의 아내라 삶이 비교적 안정적이기는 했어도 정년퇴직이 45세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스란히 맞게되었기에 예고된 난관을 준비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또 나를 내몰수밖에 없었다. 아이엠에프를 맞은 나라가 해마다 구조조정을 하는통에 회사에 살아남아 있어도 가시방석이었고 시한부 직장인이라 해마다 카운트다운을 세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명퇴를 맞았다.50세도 되기전에. 늦은 결혼에 서른둘에 낳은 큰 아이가 중3때였으니 자녀 대학학자금까지 받으며 직장생활하던 선배들을 비교하면 억울한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맞을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 그래도 그간 내핍과 내공이 다져 있어서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남들은 나라살림까지 맡아서 헤쳐 나가는데 내가정 하나 꾸려가지 못하면 되겠는가?하는 뱃짱도 생겼다. 지난 내 삶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준 덕분에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이었지만 나는 떨치고 일어설 수가 있었다. 그렇게 예까지 왔는데... 내게도 피할수가 없는 갱년기가 찾아들고 있다. 내 성격이 감성적이고 여리지만 자존감이 강하여 늘 나를 스스로 독려하고, 담금질하고,긍정 마인드로 채우고 있지만 나이에서 오는 몸의 변화와 소리를 비껴 갈수는 없다. 몇년전서부터 온 몸이 화끈거리고 열이 나며,기운이 방전되려고하여 넘친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무조건 멈추라고 나에게 주문을 건다. 몸도 마음도 에너지가 고갈되어 또 다시 고꾸라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서다. 정신력으로 몸을 제어하던 기능이 더이상 작동을 거부하는 상황. 충전이 필요한 시간이다. 중년의 삶에서 노년의 삶으로 전환하려는 시기에서 오는 몸의 소리이다. 몸에서 부대끼는 것들은 내려 놓으라고 안에서 충고한다. 과하게 달음박질 하던 습성을 버리라고 몸이 말한다. 안의 소리를 부정하다가 맥없이 스러져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될수도 있다고 몸이 말한다. 그래서 내 안을 들여다 보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니 억지로라도 나를 만나는 시간을 만들었다. 여행, 나를 만나고, 나를 발견하고, 나를 다독이고, 나를 포상한 시간이었다. 이제 향기나는 노년을 위해 잔잔하게 걸어가 볼 것이다. 아름답게 꾸려가 볼것이다. 순천만의 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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