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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사람들

조카 이야기 <무제한 천안두정점>

by 농부김영란 2011. 2. 23.

 

 

큰언니와 나는 17년이나 차이가 난다.4녀1남의 엄마의 자녀중에 큰 언니는 맏이이고 나는 네번째 딸이며

아래로 막내 아들이 있는 전형적인, 딸 많은 종갓집의 풍습을 고스란히 겪었던 내 유년시절에는

큰 언니는 나이 차이만큼이나 거리가 멀게 느껴졌었다.

큰언니 성격이 유별나서  대단한 자존심과 강한 캐릭터로 초지일관해 왔기에

엄마같은 편안함은 기대할 수가 없었고 늘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그런데 내 나이 오십을 넘기고 이제 인생 전체를 숲을 바라보듯 하게 된 나이에 오니

이제는 큰 언니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있게 되었다. 맏이와 막내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더구나 큰언니 나이가 예순 여덟이나 되었으니 이제는 그 옛날 팔팔하던 기색은 전혀 없고

2년전서부터는 갑자기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예전의 큰 언니 모습이 아니었다.

주장이  강하고, 안으로는 따뜻한 마음이 있어도 겉으로는 완전무장을 한 듯 경직된 모습이

늘 일정한 거리감을 느끼게 했었는데, 몇년전서부터는 내가 알고 있던 그 언니인가싶게

나사 하나가 빠진듯 헐거워졌고,언제나 눈동자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다 싶던 것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노인성 질환인가? 머리가 갸웃해지곤했다.

몇년전서부터 보이던 내 엄마인가 싶던 그 태도...조금씩 멀어져가는...떠날 준비를 하는 듯한...

이승과 저승의 중간지점에 계시는 듯한...

엄마에게서 느끼던 노인성 질환(나는 그렇게 부른다)의 증상이 조금씩 큰 언니에게서 보였다.

 

 

<큰조카네 무제한 천안 두정점>

 

 

큰언니의 인생내력을 들여다보면 그 독특한 성격이 형성된 이유가 고개가 끄덕거리지만

나는  큰언니는 연구대상감이라며 은근히 꼬집었었지만 개선되지는 않았었다.

마음에 바윗돌처럼 단단하게 뭉쳐진 그 어떤 결정체가 큰 언니를 살아가게 하는 버팀목이기도 한것 같았는데

천성도 그런 점이 있었지만 사는동안 겪었던 수많은 시련이 겉을 강하게 보이려고

자신을 동여매는 과정에서 형성 된 것 같았다.외유내강이 아니라 내유외강한 사람.

삶의 동앗줄을 너무 단단히 붙들고 있어서 여유가 보이지 않던 모습이 보기에도 부대꼈었다.

그 전에는 그런 언니의 성격이 불편하여 많이 부딯히고 며칠을 함께 지내기가 어려웠다.

그랬던 큰 언니가 쨍쨍하던 시선도 부드러워지고 몸에 기운이 다 빠져 나간듯 기력도 쇠하여지면서

지난 겨울 우리집이 너무 바쁘다고 아우성을 하자 일손돕기 한다고 내려왔는데

그 전의 그 언니가 아니었다.지난해 엄마가 요양원을 가는 일로 신경을 많이 써서

기력이 쇠하여졌다고 하였는데 내가 보기엔 그 보다도 갑자기 삶의 구심점을 잃은듯해 보였다.

큰 언니나 엄마나 삶의 구심점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금의환향하는 것이었다.

큰 언니는 삶에서 맹열하게 추구하던 것이 무너지자 온 몸에 병이 들어 저승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났었다.

구구절절이 이야기하기가 아련해지는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시절이 있었다.

 

 

 

 

 

조카가 초등 1학년이 되던 해 혼자 된 큰 언니가 그 이후 내내 혼자서 아이도 잘 키워내고

스스로 입신양명하겠다는 의지가 누구보다도 강렬하였었다.

그런데 큰언니의 운명이 미리 예비된 어떤 각본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결정적인  한순간에 무너지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머리가 비상한 큰 언니가 재테크를 잘하여 강남에 집도 몇채나 장만하였지만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상황이 온 것이었다.

그 즈음에 나도 큰 언니네서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난파선을 올라탄 선원들이

산산조각난 뱃조각을 부여잡고 풍랑과 파도에 휩쓸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운명의 여신이 무엇을 준비해두었는지...삶에서 무엇을 깨닫게 하려고 그리하셨는지...

1980년대 중반...그 이후 우리들의 삶은 그대로 풍랑이 되었었다.

 

 

 

 

 

이 글의 주인공이 큰 언니가 아니라 큰언니의 아들 조카 이야기인데 배경 설명이 길어졌다.

큰언니 이야기는 책을 한권 내어도 될만큼 파란만장하여 여기서 다 풀어낼 수가 없다.

큰 언니는 아들 하나를 잘 키워보겠다고 조카가 초등학교시절 지방에서 강남으로 이사했다.

그 시절에도 강남 학군과 열기는 대단하여서(오히려 지금보다 더했다)

강남진입이 곧바로 일류대로 진입하는 관문인양 강남 대이동이 만연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해외 유학이 대세라고 희석되었다해도 여전히 강남학군의 아성은 건재하는 것 같다.

나도 큰언니 따라 다니느라고 강남 여러지역을 두루 돌아 다니며 살게 되었다.

소위 극성엄마,  복부인 부류에 속한다며 큰언니를 빈정댔었는데

큰언니는 맹자엄마가 무색하게 아이 학군따라 집을 옮겨 다녔었다.

조카가 초등학교,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 이사를 몇번이나 하였는지 모른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때 영동 고등학교가 급부상하자 영동고등하교 바로 후문에 집을 얻어서

영동 고등학교에 들어가기를 바랬는데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자 경기고등하교 정문앞에 집을 얻었다.

강남에 셋방 얻기가 하늘에 별 따기인데도 용케도 잘 얻어서 이사를 하곤 했었다.

그렇다고 큰언니 형편이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도 이 부분은 한편은 크게 질타를 하면서도

한편은 혀를 내두를만큼 존경스러운 부분이기도 하였다.

존경이라함은 예나 지금이나 강남학군에 사는 사람들은 영세한 주민들은 거의 없었는데도

그 끝발 날리는 쟁쟁한 학군에 가서도 기 하나 죽지않고 초.중.고 내리 줄반장을 하도록

아이에게 기를 불어 넣은 큰언니의 투혼을 누가 따라갈 수가 있을까 싶다.

 

 

 

 

<닭다리살 닭갈비와 양념 꼼장어>

 

 

그 조카가 중 3이 되던 해 나와 함께 기거하였는데 큰 언니는 전재산을 올인하여

지방 관광지에 건물을 짓게 되었는데 그 일이 꼬이면서 모든 것이 다 무너지게 되었다.

그때 큰 언니가 생활비를 못 보내주게 되자 나도 알바를 하여 마련해둔 등록금을 생활비로 다 쓰게되어

이듬해 원하는 학교에 등록을 못하게 되어 전액장학금을 받게되는 조리과로 발길을 돌려

내 운명의 방향타도 돌리게 되었던 것이었다.나는 그래서 요리사의 길로 입문하게 되었고

큰 조카는 경기고등학교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더 아득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큰 조카와 함께 생활하던 그때 생활비를 아끼려고 매일 고추장 풀어서 양배추 넣고 끓인 국에

밥 말아먹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교육학과가 적성에 맞지않아서 전과를 하려고 공부를 다시 하던 나도 나중에는 기운이 달려서

연필들 기력조차 없던 그때가 생각난다.그 이듬해 학교를 갔어도 나도 폐결핵에 걸렸던 경험까지...

우리집도 망하고 큰언니네도 망하고...

큰언니는 추진하던 일도 망했지만 더 큰 고난을 맞이했다.

고등학교 들어갈때만 하여도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던 조카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겪게 된 것이다.

큰 언니가 사업실패로하여 상심하여 큰 병에 걸리고 말았다.

울화병이라고 하여야할까? 병명도 없는 병...쓸개즙이 터져서 간을 덮어 버린 병.

우리 몸의 생명의 중추인 간이 쓸개즙에 덮여서 숨을 쉴 수 없는 병.

암도 아니고 희귀한 병이라 병원에서는 치료할 수가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큰언니는 피부가 갈라지면서 피가 배어 나오고 얼굴빛은 저승사자처럼 거무죽죽 죽어가고 있었다.

강남성모병원에서 살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으나 연구실험대상으로 맡겨보면 실험을 해보겠다고하는

각서를 쓰고 큰언니는 병원에 입원 하였었다.간을 떼어내면 죽을수밖에 없으니

간을 뒤덮고 있는 쓸개즙을 장기간 약물로 희석시키는 방법으로 고쳐보겠다고 하였다.

언니는 2년을 넘게 병원에서 실험연구대상이 되었었다.

이미 언니의 운명은 활시위를 떠나 버렸다.그 누구도 큰언니가 다시 살아날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하지만...오직 한 사람...큰언니 자신만은 아들 혼자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다고

생명줄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내 생명보다도 더 귀한 아들의 운명이 걱정되어

어찌 눈을 감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 맹렬한 삶의 의지가 큰언니를 살려 내었을 것이다.

큰언니의 입원으로 큰조카도 망망대해에 표류하게 되었다.

엄마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장기입원해 있는데

고3을 맞은 조카가 어찌 흔들림없이 공부에 매진할 수가 있었겠는가?

 

 

 

<바다장어와 양념 쭈꾸미>

 

본인의 의지와 엄마의 열성으로 당연히 원하던 대학(s대학)에 합격할것이라고 누구나 생각 했었는데

인생에 이런 복병을 만나다니 조카의 인생역정도 파란만장하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은 이미 그로부터 30여년이 다 되어가고 있으니

담담한 추억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때 그 상황 한가운데에  있을때는

삶이 온통 회색빛이었었다. 지나고보니...그 시절도 아름다운 추억에 속하게 되었다.

 

 

<양념 참치구이와 참치회>

 

그 후...

큰 언니도 구사일생 살아났고 큰 조카도 풍랑에 좌초하지 않고

원하는 대학에 몇수를 하다가 나중에는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에 수석입학 하였었다.

그 사이  꿈과 삶의 의지가 나약했었다면 결코 건널 수가 없었던 강을 건너게 되면서

우리들은 단단한 나이테를 가진 나무들이 되었으니

삶에서 버릴 것은 어느 것 하나 없다고 생각한다.

시련은 이겨낸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되는 것이다.

 

 

 

 

 

큰조카는 대학에 들어가서 대학생벤처사업으로 교육 IT사업을 시작했다가

IT산업이 급부상했다가 가라앉는 부침을 함께 겪었다.

망하지는 않았지만 직원들 월급 주기에 빠듯한 생활의 연속....게다가

사업이란 것이 현금 장사같지 않아서 부도수표 받기 일쑤다보니 늘 허덕이게 되었다.

조카가 늘 이야기 하는 것. 사업가와 장사꾼은 다르다고 한다.

사업가는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장사꾼은 작은 것에 연연한다고 한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 의미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어렴풋이 알듯하기도 하다.

 

 

 

<아는 사람은 아는 조개중의 여왕조개 가리비>

 

사업을 추구하던 조카가 장사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현금이 나오는 장사가 있어야

생계가 불안하지 않다는 사업 선배의 조언 때문이었다.

조카가 결혼을 하면서 매달 생활비를 줄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한쪽에서 현금이 나오는 장사로 돌파구를 찾는다고 물색한 것이 음식장사나 옷장사였는데

조카로서는 두가지 다 보도, 듣도, 경험도 못한 세계였었다.

그 조카가 할수 있는 것이라고는 경영 마인드 뿐.

조카눈에 뜨인 것이 조개구이였었다.

장사 아이템을 찾던 중에 조개구이를 본 것이었다.

요리라고는 하나도 필요없는 조개구이.(조카생각에...)

살아있는 싱싱한 조개를 불판위에만 올려 놓으면 되는 것이니 해볼만하다고 덤빈 것이었다.

전국을 헤집고 다니면서 조개를 찾아 다녔다.

경상도 내륙지방에서 자라서 조개라고 알고 있는 것도 몇가지 안되고

먹어 본 기억도 별로 없지만 싱싱한 조개구이로 승부를 본다며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이름도 번쩍거리는 호텔요리사네 우리집에서는 박장대소를 하였었다.

요리요자도 모르는 집에서 식당을 오픈하는데 부부요리사라며

전도양양한척 말로만 하는 우리가 보기에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며

코믹드라마를 보는 기분으로 지켜보게 되었는데...

 

 

<관자가 가득  실한, 조개중에 대왕 키조개>

 

그 조카가 일을 낼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었다.

아니...어쩌면 산 넘고 물 건너서 젊은 나이에도 온갖 시련을 이겨내왔던 조카의 저력을 간과한 것이었다.

조개구이집이라고 피래미 조개 몇개 갖다놓고 연출만 하는게 아니었다.

요리사 한 덕분에 나는 적어도 어떤 것이 비싼 것이고 귀한 것인줄은 알게 되었는데

호텔에서도 고급요리에나 들어가는 가리비니, 키조개니,석화니...

한마리 얼마인지 원가가 대번 나오는데 그런 여왕, 대왕 조개들을 즐비하게 가져다놓고

9900원에 무제한이라고 간판을 걸었던 것이었다.

눈이 튀어나올 제안이었던 것이었다.

그 즈음에 요리사네 집에서 대박 아이디어가 나올줄 알고

메뉴 좀 개발해 달라고 우리에게 목을 메었지만 정작 요리사네 집은

요리하는거 포기하고 농사꾼이 되어있지 않았던가?

세상은 이래서 아이러니하고 재미있다.

 

 

 

<대하, 가리비가 듬뿍 넣은 칼국수...대하 가리비 석화구이...굽거나 찌거나 기호대로~>

 

눈이 튀어 나올것 같은 파격적인 간판에 사람들이 몰려 왔다.

몇년전 조카가 흥분하여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모...호떡집에 불이 난것 같다고...자신도 이렇게 몰려 올 줄은 몰랐다고...

그렇게 물밀듯이 몰려 오는 바람에 조카는 전국으로 다니면서 조개어장을 찾아내느라고 동분서주 하였다.

사람들이 몰리니까 체인점을 내달라고 목을 메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래서 몇개의 체인점까지 내고 남보기에 대박집이 되었다.

 

 

알이 꽉찬 키조개는 굽거나 찌거나...

 

<키조개위에 다진 양파, 청량초,치즈, 초고추장 올리고...구이~>

 

 

그런데 사람살이 언제나 호사다마이던가?

서해안에 유조선이 기름을 유출하면서

서해안 조개들이 모두 죽어 버리는 위기 상황을 맞게되자

조개를 구할 수가 없게되어 큰 위기에 봉착했다.

조개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원가를 도저히 맞출 수가 없게 되자

체인점들도 모두 뒤로 넘어졌고  조카도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러자 조카는 사업가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조카는 일본으로 날아가서 가리비 어장과 직거래를 했고

중국으로 날아가서 조개를 공수해오기 시작했다.

조카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일이 무너지는 것을 견딜수가 없어했다.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버텨낼수 있는 힘은 장사꾼 마인드로서는 할수가 없다하였다.

큰 손실을 보고 위기를 넘긴 후에 조카는 메뉴를 재정비 하였다한다.

 

 

<홍게, 석화, 가리비, 키조개,대하...찜!>

 

다른 사람들은 제자리에 앉아서 원재료를 감당하려니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않아서

모두들 두손 다 들고 항복하였어도 칠전팔기하는 조카는 다시 재기하였다.

그사이 무너질뻔하는 몇번의 위기를 이겨내고

메뉴도 다양화 하였다.메뉴라고해도  여전히 요리라고는 없는

원재료 자체를 찌거나 굽거나 하는 단순하지만 최상의 선택인 메뉴들.

요리사라고 뭔가 비법이 있나 싶어 우리들에게 물어도

최상의 요리는 최상의 재료를 그 자체로 먹거나 가미하지않고 찌거나 굽는것이다라는

견해 이외에 더 좋은 요리는 없다는게 우리들 지론이었다.

 

 

<차돌박이, 쭈꾸미, 양념삼겹, 바다장어,닭갈비,꼼장어,참치갈비,만두, 가래떡,소시지...지글뽀글~~~구이!>

 

 

얼마전 예슬이 실기시험 보러 갔다가 청주와 멀지않은 곳에 사는 조카와 조우하였다

내게는 여전히  까까중 중학생으로 각인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어엿한 중년의 사업가로서의 발돋음하는 의연함이 느껴졌다.

조카와 큰 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고, 심지어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면 슬픔도 묻어나지만

그 혹독한 시련을 딛고서 의젓하게 잘 살아낸 그 모습을 대하니

너무나 고맙고 의젓하게 잘 자라준 조카가  한없이 대견했다.

구비구비 힘든 순간을 내색하지않고 미소 띄며 잘 감당해주고 있는 의젓함이 대견했다.

이제는 그 어떤 비바람도 헤쳐나갈 수 있을거라는 믿음이 보였다.

 

 

<새콤달콤 간장소스를 끼얹은 상추샐러드와 키위소스를 끼얹은 양배추 샐러드~>

 

낭떠러지에  떨어진 느낌.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것 같은 절망감속에서도

삶에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잘 헤쳐나가는 것.

오십평생 살아보니 누가 누구를 일부러 돕지 않아도 스스로의 삶만 잘 꾸려나가도

그저 고맙다고 치하해주고 싶다.

제 몫의 삶만 누군가에게 피해 주지않고 잘 꾸려나가만 주어도

얼마나 고맙고 기특하게 생각 되는지...

헛된 욕심에 눈 멀어 본인도 옆사람들도 낭패 보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지라

부모, 형제, 자식, 친지들이 우는 소리내지 않고 그저 잘 살아 주기만 바란다.

조카의 지나간 어려운 순간들이 헛되지 않아 감사하다.

 

 

 

큰 언니네 아들 조카와 우리집 큰딸 예슬이가 한자리에 앉았다.

예슬이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였다가 조카가 하는 천안 가게를 방문하였다.

무엇을 먹어야 좋을지, 어떻게 먹어야 좋을지 몰라서 조카의 코치를 받아가며

예슬공주(^^)가 한상 떡하니 서비스를 받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전코스를 손님 기분으로 만끽 하려고 손님들처럼 그대로 해보겠다하며

내가 사진까지 찍었다.그렇지만 조카는 예슬이 입학기념으로 한턱 낸다하여

결국은 계산하지 않았고 그 밤 조카도 취하고, 나도 취하고

 예슬이는 엄마보다도 더 술을 잘 먹어서 내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청년기에 집안이 온통 무너져내리는 경험을 했던 큰조카와 나는 아스라한 청춘을 곱씹으며

우리집 3세대 대표주자인 조카가 주는 술잔을 가득 채워서 건배잔을 높이 들었다.

술이 달아요~하는 예슬이의 말에 화들짝 놀라긴 했지만

정말 술이 달다고 느껴진, 오랫동안 그리던 행복한 밤이었다.

 

2010.2.23

 

조카네 무제한 조개구이(조개말고도 다양한 메뉴 있음)집은

사진 맨위에 간판이 보여주고 위 사진들이 메뉴를 보여주고 있어요.

인간승리 우리 조카네 천안가게에는 서울에서도 일부러 드시러 오시기도 한다고 합니다.

(천안은 서울에서 전철로도 한시간거리)

조개구이 전문점으로 출발하였지만 여러가지로 위기에 봉착하며

다양한 재료를 첨가하게 되었답니다.

주부9단인 제가, 왕년에 요리사였던 제가 보기에도

어떻게 이 값에 이런 재료들을? 하는게 많습니다.

요리를 못하다보니 요리가 없고 전부 좋은 재료들이라

본인들이 찌거나, 굽거나, 해물 국수까지 해드시면 된답니다.

무제한이라고하여 어떤 뻔순씨는 가방을 가지고 와서 집어넣기까지 한다는데

뱃속에 무제한 넣는 것은 허용하지만 가방에 넣어가지고까지 하는 것은 상식이하의 행동이겠지요.^^

제 조카가 아니라고 하여도 이 재료들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질 재료들이지요?

청년기에 그 고난에  굴하지 않고 잘 헤쳐 나온 우리 조카를

오늘 인간승리의 주인공으로 추천합니다.

<무제한 천안 두정점...523-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