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의 귀농일기-<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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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상 입춘이 지나니 바람결이 다르다. 선조들의 계절 감각에 또 혀를 내두른다. 끝이날것 같지않게 푹푹 찌던 무더위가 슬며시 꼬리를 내리는게 확연하다. 무딘 사람들보다도 자연은 벌써부터 가을이 저만치 오고 있음을 눈치채고 보름전 소독할때부터 하늘에는 고추잠자리가 가득하고 귤들이 탱글탱글한 모습으로 얼굴을 활짝 드러내고 있었다. 귤들이 빛나는 얼굴들을 드러내기 시작하니까 온 몸이 땀범벅이 되어서도 마음은 들뜨기 시작했다.
엊그제는 태풍 덴무가 물러가고 올해 방제소독으로는 마지막 소독을 하면서 보니까 그 사이 귤들이 또 많이 자라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잎새 사이에서 두드러지게 활짝 웃는 모습에 산고를 치르고 새 생명을 만난 산모의 기쁨처럼 마음이 애뜻하고 충만해져 왔다.
이제부터는 귤들이 하루하루 다르게 커져가고 맛도 들어 갈것이다. 결실을 위해 그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햇볕과 바람과 땅속에서 길어 올린 온갖 미네랄과 미생물들로 감칠맛 나는 열매를 만들기 위해 마지막 노력을 질주할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노력해서 언제나 좋은 열매를 얻는다고 생각하지만 자연은 사람의 노력은 1%도 안될수도 있다는 것을 간간히 일러 준다. 올해 꽃눈이 생길때 냉해가 와서 극심한 해걸이 현상을 겪는 효돈밭을 보면서 이런 자연현상을 절감한다.
나는 지난해 너무 늦께까지 열매를 달아둔 죄가 있으므로 각오한 바이기도 하지만 올해 많은 결실을 보려고 일부러 작년에 열매솎기까지한 이웃밭까지도 피해갈 수 없었던 자연현상에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는 말을 또 실감한다.
효돈밭 일대는 여름순이 넘쳐나서 때아닌 연두빛 물결인데 속모르는 이들은 이 풍경이 장관일지도 모르나 밭주인 농부들은 한숨이 절로 나오고 눈물겨운 보릿고개를 떠올려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작년에 이천박스 넘게 생산한 우리밭을 살펴보니 열박스도 안되겠다 싶었는데 숨어있던 귤들이 얼굴을 간간히 내미는 것을 보니 오십여박스나 될지 모르겠다. 그것도 작게 달리면 거의가 대과가 될 것들이라 올농사는 접은 셈인 것이다.
그래도 나는 필요에 따라 밭을 장만하다보니 세군데로 나누어져 있어서 일하기는 너무 번거롭고 비능률적이었지만 다른 두밭이 조금 형편이 나은 셈이라서 그나마 안도하지만 효돈밭 일대에 밭이 하나인 농부들은 수확기에 망연자실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지난해는 대풍이어서 귤값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고민하였는데 올해는 아예 수확할 귤이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다니... 거기다가 올해는 일조량도 너무 부족한 상황이라서 지금부터라도 햇볕이 좋아서 남은 귤이라도 맛이 잘 들어 주어야 할 터인데...
기도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새로운 고민을 치열하게 해 볼 때이다. 내년에도 이상기온 현상이 나타나지 않으란 법이 없으니 말이다. 제주도는 섬 전체가 관광지라는 것과 아직까지는 귤이 제주도에서만 생산 된다는 사실을 나는 주목하고 있다. 길이 없으면 올레길처럼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사람의 마음과 의지로 온갖 궁리를 해보면서도 무릎 끓고 하늘에 기도하는 농심을 하늘마음이 헤아려 주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