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셋째주 토요일
셋째형부는 우리와 살아서는 볼수 없는 길로 떠나셨다.
아픈 몸으로 오래도록 버티어 주셨다.
병원생활 5년.
아직도 꽃같은 내 언니는 하얗게 빛바래 가고
어린 딸들에게 아픈 몸이라도
곁에 있어 주는 것이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몇번의 생사를 넘는 고비를 넘기고서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희미한 불빛을 지켜 가시더니...
이제는
이제는
당신 혼자서도 잘 해 낼수가 있을거야
나도 더이상 버틸 힘이 없소.
이제는 내 무거운 짐을 벗어 드리리다.
아이들 좀 더 클 동안만이라도
꺼져가는 의식을 붙들며 삶에 매달려 왔소
그러나 이젠 당신께도 내가 너무 무거운 짐인것 같소
이제는
나없는 세상이라도 모두들 잘 해 내리라 믿습니다
당신의 지극정성 사랑이 아니었으면
난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어야 할 사람
당신 곁에 나의 분신 예쁜 세 딸들을 두고 가오
당신, 너무 너무 미안하오
그렇게 형부는 언니와 세 딸들을 남겨 두고
이승을 떠났다.
스물둘, 스물, 열세살 딸들과
쉰한살, 아직은 미망인이 되기엔 젊은 내 언니가
형부를 떠나 보내고 구슬피 울었다.
어질고 착하기만 한 내 언니는
가슴으로 울었다.
그 울음 소리가 내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이 일을 어이할꼬.
떠난 사람도 안타깝지만
남은 사람이 아파서 가슴이 아려온다.
인생이란...사실 늘 그런걸.
언니같은 동생은 엄마같이 윽박 질렀다.
앞으로는 절대로 울면 안된다고.
아이들 앞에서 우는 모습 보이면 안된다고.
때론 울고 싶어도 눈물없는 사람처럼 강하게 살아내야한다고.
엄마는 그래야 하는거다고.
살다가 힘들날 많이 올거라고.
아빠없는 빈자리
살아가면서 많이 느낄거라고.
잘 해낼수가 있고 또 잘해내야만 한다고 다짐다짐 하였다.
돌아서 오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지만
산 사람은 또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이별은 그렇게 우리곁에 늘 머무는 것을 잊고 산다.
지난 일요일 일본 오사카로 떠나서 어제(금요일) 돌아왔습니다.
일본의 장례식은 우리와 많이 달랐습니다.
생화로 가득찬 장례식장은 마치 화원 같았습니다.
장례식장도 마을안에 있었고 화장터도 마을안에 있었습니다.
화장한 뼈조각은 분쇄하지않고 상주들이 뼈조각을
단지에 모아서 49제까지 집안에 모셔두고 함께 한다 합니다.
관습과 의식의 차이를 느꼈습니다.
저는 다시 일상 복귀하여 오늘 하루는 휴식 취했고
이제 앞으로는 수확과 판매로 정신이 없을 때가 되었읍니다.
저와 연락이 안되어서 걱정 하셨던 분들께
제가 다시 돌아와 일상 복귀 하였음을 보고 드립니다.
2009.10.24 英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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