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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내 블러그 친구

by 농부김영란 2006. 10. 6.

 

 

 

블러그가 아닌 칼럼이던 시절에 감히 진출하여

예나 지금이나 저질러놓고 보자는 식의 내 치기가 겁없는 수다 하나로 종횡무진하며

내 안의 듫끓는 감정들을 쏟아내던 시절이 어언 햇수로 따져보니 몇년째이던가.

참 많은 말을 정제도 없이 쏟아 내었다 싶다.

무슨 하고픈 말이 그리도 많은지...쉼도없이 줄기차게 몇 해 쏟아내고나니

그 또한 허한 일이라 느껴져 잠적하고픈 맘이 더러 드는 것을

사람이 나이값 못하고 진중치 못한 입 닮아 행동까지 너무 가볍단 소릴 들을까봐서

차마 잠적하지는 못하고 내 멋대로 댓글을 닫았다 열었다하며

이제는 간신이 유지 관리하는 수준인데도 그럼에도 뒤돌아 보니

영양가없이 쏟아낸 수다중에는 진실이 알알이 박힌 글 비스무리한 것들도 있기에

다시 읽어보니 내 삶의 흔적을 이렇게라도 남겨 두는 것도

별볼일 없는 인생이지만 "짹" 소리라도 남기고 갈것같아 그냥 이대로 가기로 해본다.

 

나란 인간...내가 생각해도 연구대상감이야...할때가 많아서

이런식으로라도 치기를 발산하지 않으면 안으로 쌓아서 지레 열병에 걸려

명을 단축할것 같기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고

내 맘대로 지껄여 댈수 있는 이 공간에서 때로 부끄러움을 감수하고라도

내 정서 안정을 위한답시고 이 블러그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봉천동 아지매와 춤을"이란 제목으로 랄라하면서 둥지를 틀고

수다를 풀어내고 있었는데 기라성같은 칼럼 선배님들이

내 수다둥지에 찾아 주시기도 하고 그에 감읍하여

버선발로 달려나가서 반가이 맞았던 칼럼 초창기 시절도

이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게 되었다. 

칼럼 초기부터 유대를 맺어온 분들이 지금도 여전히 친구로 남아있고

지금은 어찌보면 시건방지기 짝이없는 블러그지기까지 되어있다.

오시는 분 정중하게 맞는 것도 소원할 뿐더러

내가 바쁘다는 핑계 대면서 블러그도 내 멋대로 글 올리고

찾아가서 안부 여쭙는 것은 거의 않고, 그래도 날 잊지않고

변함없는 우정을 표현해주는 블러그 친구들께 늘 미안하면서도

예전에 비하면 불성실하기 그지없게 되었다.

 

칼럼 초기부터 날 알게되신 분들은 그간의 내 변화를 아시고

나의 몸부림같은 시도들을 공감이 가지 않는 이야길텐데도

진심 어리게 받아 들여서 내가 휘청 거릴때 힘을 주시고,손을 기꺼이 잡아 주셨다.

때론 나 스스로도 날 감당하지 못할만큼 내가 용트림을 하고 있을때 조차도

잔잔한 눈길로...나를...내 안을 들여다 보시고 조용히 손 잡아 주시는 것을 느꼈었다.

더구나 이곳에 이사 오면서부터 여러가지로 내게 변화를 시도하여

부대낀다고 심하게 엄살(?)을 부려도 언제나 조용히 지켜봐 준 친구들의 눈길을 느낀다.

그렇다, 이젠, 말 없어도 그냥 느낀다.

나는 그렇다, 이젠 내 블러그 친구들이 말이 없어도 느낀다.

그럴만큼의 세월이 켜켜이 고인 것을 느낀다.

그리고...내 나이가...그렇게 느낀다.

내가 힘들면 너도 힘든게지.그런데도 넌 따뜻하구나....그렇게...

말 없어도 따뜻한 이야기가 우리 사이엔 흐르고 있다.

 

나는 백지위에 풀어놓는 수다에는 일가견(?)이 있어도

실제 대인 관계는 그리 원활치 못한 것이 안으로 은근히 낯가림이 심한 편이다.

더구나 이제는 어설픈 인간 관계로하여 피곤하고싶지 않아서

언제부터인가 블러그에서의 잡음을 겪은 후부터(내가 아니고 이 공간에서의 잡음)

웬만해선 블러그 친구든 오프라인 친구든 새로 사귀는 것을 사양하고 있었다.

우선 내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는 일이 더 중요했고,

그리고...

사람은...오래가도...변함없을 그런 사람이 아니면

가벼운 유희는 사양하고 싶고...

그런 친구를 이곳에서도 만났었다.

덧없는 인기에 편승할 나이도 아니고,소위 코드가 맞아야 행복한 교류가 될 터...

나의 이런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늘 나를 격려해 준 친구를.

그래서...기운이 잦아들 때도 힘이 났었다.

그 사랑의 힘으로...난 다시 기운을 추스리고 있다.

올해는...어쩌면 내가 거듭 나는 한 해였는지도 모른다.

그 탈피의 과정을...그 요란한 진통의 표현을...

늘 성숙하게 받아주는 친구가 있어서 난 결코 쓰러질 수가 없었다.

꺼져들듯 하면서도 다시 힘을 낼수 있었던 것은...사랑과 신뢰와 배려의 힘 덕분이었다.

한결같은 우정을 보낸 친구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덕분에...해피 추석을  보내었다.

 

2006.10.6.

 

 

 

2003년 9월에 아랫글 올리고 왕언니 선배님 눈물샘 자극하여(ㅎㅎ...)

선배님의 제안으로 가졌던 첫 칼럼 친구들과의 만남을 10월에 가졌었다.

거의 선배님들이라서 조심스레 추진했었는데 벌써 만 3년이 지난 이야기가 되었다.

왕언니님,달빛천사님,생명수님,섬님,아침향기님,김애란님,미아님,그리고 나...

그땐 모두 나보다 월등히 빛나는 선배님들이시라서 몹시 긴장 했었는데

지금은 시나브로 젖어든 정때문인지...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주는

고향 어귀의 느티나무처럼 느껴진다. 그후 캐나다의 세자매맘인 민디님,

호주의 justina님,세자매대디인 화언화우님을 제주도에 오신 길에 만났었고

얼마전 섬님은 제주도에 온 길에 두번째 만남을 가졌었다.

아직은 내가 온라인이나 오프라인 모두 여유가 있는 처지가 못되어서

마음에 있어도 찹아뵙지 못한 제주도 친구도 있고,누구나 반겨서 맞기엔 버거운 실정이지만

세월이 쌓이면서 비록 뵙지는 못했어도 오랫동안 사귄 친구나 친형제만큼이나

가깝게 여겨지시는 분들도 계신다.때가되면 반갑게 뵙고 싶은 분들이시다.

비록 사이버 공간이지만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하시는 분들이라서

내가 살아가는 보잘것없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그런 나를...

어깨동무 해 주시는 고운 분들께 새삼 감사를 드린다.

세월을 반추할 나이는 아니지만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되새김질 하면서 지금의 나를 돌아본다.

내 안의 어떤 끼가 나를 끊임없이 자극하여 쉼없이 담금질하게 만들기에

같은 길을 가면서도 내 몸짓은 유난히 더 부산하고, 더 예민하고,더 요란한 반응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는것 같다. 예를 들면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는 풀꽃 하나에도

난...숨이 멎을만큼 감동하여 감정을 주체 못하는 것이다.그래서 남들은 한낮 농사에 불과한 것을

난 그 안의 세밀한 언어들을 다 들으려고, 작은 향기도 놓치지 않으려고 해서

내 그릇이 넘쳐나서 늘...버벅 거린다. 이런...나를...괴물(?)로 여기지 않고 진솔한 인간으로

받아들여 손 잡아 주시는 분들의 숨결에 감사할 뿐이다.집앞에 사우나가 생긴지 반년이 지났어도

한번도 가 볼 마음도 내지 않으면서도 몇시간이나 달려가는 김 영갑 갤러리는 몇번이나 가서

그 바람을 느끼는 내 안의 끼...이 바람을 이해해 주고...나를...내 감성을...고스란히 이해해 주는

그런 내 친구에게...거듭 감사를 드린다.

 

 

 

 

 

 

무더위와 습도와 복잡한 생각들로 침식당한 내 입맛이 도통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입안에 가시가 돋은듯 까슬하니 깔깔거리고, 모래알이 굴러 다니는듯 지금 거리는 것이 벌써 한달째...
이래서 무더운 여름 나고나면 기운 없는 노인들이 탈진하여 이승을 하직하는 예가 많은가부다.
아직은 나이로나, 정신력으로나 헉헉거리면서도 버틸수 있지만
가는 바람결에도 흔들리는 노인네들의 건강으로는 이런 여름을 지내고나면 정신을 놓을만 할것 같다.
입맛도 없으니, 제대로 영양 공급이 안되어서 더욱 기력을 찾지 못할터...
입맛을 되돌려 줄 음식이 간절하다.

얼마전부터 내 이런 입맛에 유난히 떠오르는 음식이 있다.
20년 전이 다 되어가는 K대앞의 명동 칼국수에서 먹던 그 김치가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다.
맛기찬 김치 하나로 유명해진 명동 칼국수가 아직도 그 맛으로 남아있는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다.
명동 본점에서도 느낄수 없었던, 그 맛이 가난한 고학생 시절에 궁한 입맛을 황홀하게 해주던 탓이었는지
지금까지 K대앞에서 먹었던 그 칼국수와 김치가 가장 맛있었던 생각만 난다.
여름내내 그 칼국수와 김치가 어른거렸지만 올 여름은 내가 유난히 바쁘게 돌아다닐 일이 많았고
그 칼국수도 먹고, 오랫만에 아이들과 엄마가 다니던 학교에도 가 보고자했는데도
결국 이루지 못하고 이제 가을 소슬 바람이 느껴지니 만사 제치고 그 칼국수와 김치를 먹으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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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때는 유난히 힘든 고비를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기분이었는데...
난...아주 가난한 고학생이었다.외로움을 내 비치지 않으려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마음을 꽁꽁 무장하여
한 여름에도 시베리아 벌판의 황량한 바람을 간직하고 살던 시절이었는데
이제 돌아보니 간절한 그리움이 샘 솟는 것이 어인 일일꼬.
참으로 가난했던 시절, 내 헝클어진 자존심을 내 비치지 않으려고
안으로만 갈무리해 둔 시린 바람이 차가운 기류로 내 안에 머물러서
끝내는 폐결핵이라는 병까지 떠안았던 그 시절.
남동생의 고시 공부를 위해 온 집안이 기울어진 마지막 가세를 남 동생에게 퍼붓던 시절이라
난 감히 내 꿈을 이루겠다고 집안의 시선을 집중시킬 형편도 용기도 없었던지라
"홀로 일어서리라,떨치고 일어 나리라"는 다짐을 하고 고학의 길을 가고 있었다.
낮에는 아이를 가르키고, 밤에는 아는 이의 카페에서 casher 일을 봐주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때론 라면 하나로 하루를 버틴 적도 있던 그 시절.
내 현실을 생각하면,아무 걱정없이 대학 생활을 낭만을 만끽하는 친구들에게 한없이 위축되려 하고
한없이 눈물이 흐르려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를 지탱해 주는 자존심이
나의 궁색함을 바깥으로 비치는 일을 용납하지 못했다.
젊은이가 집안의 도움 없이는 가난하다는게 내 죄인가마는 왜 난 그 시절 내 가난이 내 죄인양 모두에게 절대 내색지 않고
혼자서만 움켜지고 살았는지...그 똘똘 뭉친 허상을 깨뜨리게 된 것은
그후 폐 결핵을 앓고,서른 고개를 넘으면서부터 내 인생을 꽉 조이고있던 내 부질없는 자존심이
정말 보잘것 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서야 그 팽팽한 줄을 놓고서
나를 느슨하게 하고, 나를 헐거워지게 하고, 바보스럽게 헤실거리며 웃을수도 있게 되었다.
내 20대가 그렇게 하얗게 빛바랜 청춘의 빛깔로 도색하고서
찬란한 햇살 아래서도 슬픈 파도가 출렁이던 내 안의 풍경을 비싼 댓가를 치르고서야 조금씩 잠재울 수가 있었다.

나를 너무 학대하고, 소홀히 한 댓가로 난 고학생에게 더욱 절망적인 상황을 맞게 되었다. 폐결핵이 걸린 것이다.
집안의 도움 전혀없이 학교를 다니며 한가닥 꿈을 매달은 가느다란 한줄 실끈을 잡고 버티고 있던 그때,
폐결핵은 지금의 암 소식만큼이나 암담한, 가혹한 현실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의 고민이 내것인양
이제는 꿈때문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것이다.
돌아보니 날 도와줄 형편이 못되는 집안 형편을 아는지라
난 그때부터 내 인생에 정면 도전을 선언했다.사는 것도 죽는 것도내 운명일터...
내 명줄이 길다면 살리라...그냥...앞으로 나아가는거다...
폐결핵이란 전염성 호흡기 질병인데 장기간을 치료 받아야만 하는 가난한 병이었다.
못사는 나라에 많이 발병하던 병인데 요즘은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빈번한 병이라 하니 학생들이
수험생활로 장기간 건강이 허약해진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것 같다.
폐결핵은 발병기인 20여일 정도만 전염성이 있고 치료받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때야 알게 되었는데 단기 치료로는 9개월동안 약을 먹고(10여알 정도),
6개월을 매일 주사를 맞아야 한다했다.천우 신조인지 아는 의사님으로부터
무료로 약을 공급받게 되었고 간호원이던 친구에게서 저렴하게 주사를 맞을수 있었는데
난 그때 상황이 잘 먹으며 요양 생활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부터...내 인생 신조...독일 병정처럼 단단하게 보이는 내 분위기를 만들어 가게 되었던 것.
그전까지만 해도 내 삶을 개척한다하면서도 늘 속으로는 흐느적거리며,

눈물이 줄줄 흐르는 연약한 심성이었는데...
이겨내지 않으면 침몰할게 뻔한 상황에 맞부딫히고 보니 스스로를 무장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굳세어라, 금순아...늘 기도문처럼 자신에게 주문을 걸곤 했다.
2월에 발병했는데 휴학을 할것인가, 새학기를 진행할것인가 잠시 고민하다가
전염되는 기간이 지남으로 그냥 앞을 향해서 걸어가 보기로 했다.
잠시 그 당시에 날 아프게 한 사건이 또 하나 떠오른다.
아파트 작은 방에 세들어 살았는데 주인은 초등학생 하나 데리고 혼자 살던 아줌마였고
유난히 깔끔하게 굴어서 마루를 지나가면 내 발자욱이 남을까봐 내 발자욱을 쫓는 청결한 사람이었는데
한편 얼굴은 미인인데 찬바람이 서늘하게 전해져 올 정도로 차가운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내 기침 소리에 눈치를 챘는지 핑계를 대며 방을 빼라 했다.이해는 가지만
세상 인심을 확인하는 사건이었는데 그에 대비해 천사같은 분을 또 만났으니
세상은 그래도 따뜻하게 굴러 가나부다.회령이 엄마...내가 가르키던 중 3 아이 엄마였는데
화곡동에서 한의사를 하는 큰언니 친구 언니의 집이었다.
회령 엄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종교때문이 아니라도 너무나 심성이 따뜻한 분이셨는데
내가 폐결핵이라는 눈치를 전혀 채지 않게하려 했는데도 눈치를 채셨는지 나만 가면 진수성찬을 내오며
아이 공부를 봐주는 것보다도 영양 보충을 해 주시려고 애 쓰시는게 느껴져서 송구스럽기 그지 없었다.
회령이는 엄마닮아 마음은 너무나 순수하고 착했는데 공부만은 영 딴짓만 일삼으니
부모님이 안타까와 하셨다.그 아이와 그 엄마가 지금은 어쩌다가 연락이 끊겨 버렸는데
요즘은 간절히 생각나고, 그때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폐결핵임을 알고서 난 새학기를 그대로 맞았고, 약을 먹으면서,주사를 맞으면서
하던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며 학교를 다녔다.
그해 봄, 캠퍼스를 가득히 메우며 화사하게 피어난 벚꽃들이 축제 분위기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계절이었건만 내게는 천상의 유희라도 보듯 강 건너에서 일어나는 삶의 모습인양 느껴졌다.
내 감정 전체가 하얗게 빛 바래서 어질거리는 발걸음으로 시계추처럼 무의식 중에 왔다갔다 하면서 살아내고 있었다.
들끓던 감정들도...살아야겠다는 한줄기 삶의 줄을 타는 심정 앞에서 잠잠해지고...
하얀 벛꽃들이 눈부시게 흩날리던 교정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지도 교수님도 나의 창백한 표정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혹시 어디 아픈게 아니냐고 물어 오셨지만...
절대 아무에게도 눈치 못채게 혼자서 감당해 나가고 있었다.
주사를 맞기위해 매일 병원 가는것도 시간의 쫓김과 번거로움 때문에 간호사 친구로부터 주사 놓는 법을 배워와서
내 엉덩이에 내가 주사를 놓고는 일상을 그대로 밀고 나가고 있었는데
근육이 풀리지 않아서 딱딱해진 엉덩이에 주사 바늘이 들어가지 않아서 힘들었던 기억도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감추고 위장해도 흘러 나오는 빛이 힘없고 허약했는지
주변 사람들이 날 안스러이 바라볼때면 난...오히려...아주 넘치는 삶의 의욕을 자랑하면서...
속으로는 내 삶의 기운이 빠져 나갈까봐 안간힘을 썼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먹던 명동 칼국수는 그때 당시 3500원이니 고학생에게는 가벼운 한끼 식사는 아니었지만
내가 벌어 쓰던 시절이기에 친구들끼리 한턱 쏠때는 자주 찾던 곳이었다.
(난 그때 학교를 몇년후에 다시 했으므로 동급생은 또래가 아니고 동생들이었고
복학하거나 진로를 수정해서 들어온 내 또래의 남자 아이들이 이성적인 감정을 가지고 접근해 올수록
난 감히 접근 못할 여자인양...더욱...남자보다 씩씩하게 굴어서 이성적인 감정을 싹을 잘라 버렸다.)
그 녀석들도 생각 난다.지금쯤 다들 가장으로서,사회에서 한 몫들을하며 살아들 가고 있겠지만...
아마도 한 두 녀석쯤은 날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있지나 않을까.ㅎㅎㅎ...착각으로 잠시 즐거워 보련다.
꼴찌로 들어와서 고지식하게 공부만 파더니 장학생이 되었다면서 나에게 고백했던 한 아이...
내가 공부도 못하는게...하면서 무시당한 울분에 기어이 장학생이 되었다며 내게 자랑하드만...
난 또 그랬었지.죽어라고 파서도 그것밖에 못하냐?...(에구구...k야. 용서 바란데이)
답답한 인물은 내과가 아니라며...그렇게 가난하고, 슬픈 현실속에서도 내 자존심은 기를 꺾일줄 모르고...
잘난 척을 일삼았지.ㅋㅋㅋ...왜냐면...난 아르바이트를 두탕이나 뛰고서도 장학금을 탔걸랑.
제대로 강의 못 들어가서 정리가 안된 내 노트를 기웃거렸지만 비법이 있었지롱.
잘 판서한 고 지식이한테 명동 칼국수 사주고, 기분도 맞춰주고
시험 보름전서부터 요약 정리를 해서 고것만 외워댔지.
그런데 빌려준 고 지식이도,머리 싸메고 밤낮으로 책과 씨름하던 답답이도 제치고...
난 장학금을 거머쥐고는 한턱을 쏴대니... 녀석들...내가 가히 지능 지수가 네 자리수인가 하고 비법을 알려 달라했지만...
비법은 무신 비법...지름길로 가는 길을 택했을 뿐이라네.ㅎㅎㅎ...
그런데...이 오만 방자한 태도가 내 인생을 오히려 어느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게한 불씨일 줄이야 이제야 깨닫네.
그 고지식이는, 그 미련이는 아마도 지금쯤 한 우물만 파서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한자리 지키면서 제 몫을 해내고 있을터(실제로 학교 여고 동창 중에도 머리는 총명치 않아도 끝까지 포기않고
자신의 길을 모색해서 박사까지 된 친구도 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도 거북이가 이겼듯 인생이 우리에게 교훈을 남기는게 무엇인가.
총명한 재주도,빛나는 미모도,탁월한 감성도...그 무엇도 우직한 거북이를 당할수는 없다는 것을.

내 안에 잠재된 끼가 있었던지,난 사실 공부라면 어느정도 지름길 (사실은 집중력일지도)을 터득하고는 있었지만
고지식한 학문 세계와 고리 타분한 사람들이 포진한 경직된 그 사회가 (내가 느끼기에) 너무 숨막힐것 같아서
교수님이 조교로 남아서 남 가듯이 교수 자리 바라보며 학교에 남으라는 것을 뿌리치고...
파도가 휘 몰아치는 대양으로 나가겠노라고 호언 장담하며...사회로 나왔다.
깨어지고 찢어지고,때로는 정신을 아득히 잃을 정도가 되게 호되게 얻어맞더라도
난 따분한 일상을,권태로운 명예를,사회적인 통념을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이기에는
내 기질이 이미 너무 자유 방임으로 길들어져 버렸나보다.

명동 칼국수로 돌아가 좀더 추억해 보련다.
가난한 대학생들과 한창 먹을 나이에 한 주먹되는 분식이 영양과 포만감을 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음을 아는 주인의 전략인지
명동 칼국수가 우리들에게 인기를 끈것은 사리를 무제한 제공한다는 점이었다.
그녀석 s, 치마만 둘러도 헬헬거리며 침을 흘린다는 남자들의 속성탓인지 (아닌 분들은 용서 바라며)
나를 비롯한 여학생들에게 껄떡거려서 핀잔 받기 일쑤였지만 워낙 심성이 착한지라
머슴처럼(?) 달고 다니며 궂은 일 시키며(ㅋㅋㅋ...) 잘 어울렸는데
녀석은 명동 칼국수 주인이 반기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칼국수 하나 시켜놓고는 사리를 8개까지 시킨 적이 있고(삼박 사일 굶었던게 아닐까, 혹시)
보통이 4개정도 사리를 추가 시키는 인물이니 명동 칼국수집 주인 애 간장을 녹게 하였을지도 모른다.
김치도 서너번은 추가 시켜대는 우리들이었으니 주인 입장에서는 반갑지 못한 손님일터인데도
한번도 인상 지푸린 적이 없었던 것을 보니, 그래도 가난한 대학생들의 주머니 사정도 감안한 주인의 심성이 엿보인다.

요즘 깔깔한 입맛을 되돌릴 궁리를 하다보니 k대 앞의 그 명동 칼국수 집이 유난히 생각난다.
아마도 지금은 주인이 바뀌고 아예 그 자리에 없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결혼후 한번도 학교에 가지 않았다)
뇌리에서 맴도는 그 칼국수와 김치를 한사발 먹고 나면 웬지 기운이 차려질 것 같다.
그 칼국수와 더불어 나의 아름다운(?) 20대가 떠오르고, 아스라한 그길로 간간히 사람 좋은 그 녀석들도 아슴하니 떠오른다.
보고 싶은 녀석들!(체면,형식 다 벗어 던지고 이렇게 부르고 싶다.)
세 아이의 엄마라는 명함밖에 없는 날...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2003년 9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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