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남편의 직장 발령으로 제주도에 내려왔다. 초등학교 6학년, 4학년, 1학년짜리 세 자매를 데리고 소풍처럼 따라 제주도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3년 후에는 서울로 되돌아가리라는 생각이었다. 제주도가 마법의 섬이라는 것을 그땐 몰랐다.
태생적으로 자연을 좋아하고, 꽃 가꾸기를 즐기던 내게 제주도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11월, 육지에서는 겨울맞이로 쓸쓸하고 황량해지는데, 제주도의 겨울은 남국의 풍경이었다. 한라산은 하얀 눈으로 덮여있었지만 따뜻한 서귀포에는 황금색 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고, 귤밭 아래에는 제비꽃이 피어 있었다.
오름에는 보랏빛 꽃향유가 융단처럼 깔려 있었고, 엉겅퀴와 용담이 피어 있었다. 곶자왈 숲에는 귀여운 콩란이 화산석에 붙어 자라고 있었고, 사방에 초록 요정들이 속살거리 듯 했다.
도시에서 늘 자연을 그리워하던 여자가 제주도의 자연을 보고 황홀해서 비몽사몽 했다. 첫 번째 겨울이 다 가기도 전에 나는 이미 결심했다. “서울로 돌아가지 않을 테야~”
그리고는 전세 놓은 돈으로 귤밭 하나를 덜컥 사버렸다. 귤밭을 본 것도 처음이었고, 농사도 처음이었다. 무모한 건지, 용감한 건지... 그때 나는 대한민국 40대 아줌마의 기백을 거침없이 발휘했다.
이후 제주도 기후 중 고사리 장마(제주도에서 봄철 고사리가 나올 때쯤인 4~5월에 내리는 장마)를 시작으로, 긴긴 장마에 습도가 높아서 견디기 힘든 것과 태풍 길목에서 여름이면 태풍에 간을 졸이는 일이 다반사인 것을 몰랐었다.
휘몰아치는 태풍 바람처럼 3년 후 남편이 명퇴를 당하면서 내 삶도 태풍 한가운데 서게 됐다. 마흔일곱 살, 남편은 20년을 다닌 직장에서 퇴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큰아이가 중3인데... 이제부터 큰돈이 들어갈 시점인데... 아이가 셋이나 되는 가장인데...” 가능하면 끝까지 버티라고 남편을 독려했지만, 자리를 없애고 일도 주지 않고 스스로 나가기를 바라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버틸 수는 없었나보다.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떨치고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 키우느라 오랫동안 전업주부였고, 경력이 단절된 나는 젖 먹던 힘을 끌어올리느라 쉼 없이 마중물을 쏟아부었다. “남들이 한다면 나도 할 수 있어~” 마음을 단단하게 하려고 수없이 외친 말이다.
남편이 회사에서 나오기 전, 나는 귤밭을 사서 3년간 농부 연습을 했다. 그랬더니 어렴풋이 방향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내처 그 길을 가보기로 결심했다. 진이 다 빠져서 돌아온 남편은 회사부품으로 살아왔기에 독립개체로 살아가기에 나약했다. 풍랑바다에서 쪽배를 모는 역할은 내가 해야 했다. “엄마는 강하다~”
이후 내게 펼쳐진 신세계는 수퍼맨이 됐고, 가끔은 슬퍼맨이 됐고, 때론 술퍼맨도 됐다.
16년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리 달려오고 나니, 이제 내가 그리도 좋아하는 꽃밭을 만들어서 희망꽃씨를 가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