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여성신문에서 저의 두서없는 잡문을 실어 주시고 원고료까지 주셔서
일주일에 한번씩 머리털을 뽑으며 쥐어짜서 글을 쓰고 있답니다.^^
그동안 아무렇게나 지껄여도 누구 하나 태클도 없고
저의 수다에 익숙해진 회원님들은 글을 잘 쓴다는 칭찬(예의상이겠지만^^) 까지 해주시니
눈이 눈썹위로 올라가서 기형아가 되었습니다. 겸손이 힘든 인간...이 나이에도 우쭐댑니다.
치명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신은 저에게 반성하는 주머니를 하나 달아 주셔서
스스로 반성하고 부끄러워하는 것도 잘 합니다. (혹시 꽃들이 늘 일러 주는지...)
에궁, 부끄럽네.....반성까지도 잘 하는데...또 넘어야 하는 산.
나를 고치는 일...남들은 삼천배를 한다, 100일 철야 기도를 한다, 몇달만에 10kg을 뺀다~하는
극기와 인내의 꽃을 피우던데...저는 숨 쉬는 운동과 먹는 운동...꽃 키우느라 왔다갔다하는(평균 5천보)
그 정도가 운동이라고 위안하며 잘 먹기만하니 (음식 아까와 남기지 않음)
무거운 몸은 절대로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마음도 복잡 다단 합니다.
(꽃에 미치지 않고, 돈이나, 이성이나, 쇼핑이나...그런 것에 미쳤다면 얼마나 공해를 더했을꼬~ㅎㅎ)
원고료를 받으니 신이 나서 그 돈으로 꽃나무를 샀습니다.
5년 후...꽃동산이 될거야~ 그러면서...원고료 꽃나무들이 귤밭을 채우고 있습니다.
아직도 살 꽃나무가 더 있어서 짤리지 않으려고 화요일 원고료 마감일에는 머리를 쥐어 짭니다.
전문작가가 아닌 농부에게 글 써달라고 하는 취지가 유려한 문장력을 보려는 것은 아닐터라고 생각하고
농촌여성으로서 겪은 경험담이나 느낀 점 등을 단순하게 써서 보내고 언제든지 짤라도 좋다고 말해 줍니다.
혹시나 짤라야 하는데 고민하실까봐서...
암튼...제 머리에 쥐가 나기는 해도 덕분에 일주일에 한번씩 의무적으로 글을 써야 하니까...
어쩌면 그림처럼 이것도 조금씩 나아가지지않을까 생각 해 봅니다.
이런 잡문을 자랑하려고 올려 두는 것은 아니고...제 삶이 흘러가는대로 기록해 두려고 올려 둡니다.
더 할머니가 되어서 뒤를 돌아볼 때 기억은 없는데 기록이 내 삶을 반추하게 해 줄것이라서요.
탐욕이 없는 척 욕심 사나운 사람들을 비난하던 저는 내 안의 탐심이 용광로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우자 해놓고 또 꽃으로 채우는 이것도 일종의 탐심의 발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일개미의 습성이 온 몸을 휘감아서 곶간에 가득히 채워야 직성이 풀리는지
꽃밭이 1년사이 또 가득해졌습니다. 미친듯이...열심히...한 결과...
그래도 꽃은 나도 즐겁고 남도 즐겁게 하니까.....얼마나 다행입니까? 꽃에 미친 것이....
꽃동산 이쁘게 만들어서 그동안 반디농장과 함께 해주신 우리 회원님들과 축제를 하기를 다시 꿈꿉니다.
요 몇년동안 삶에 지쳐서 방전 되었는데 꽃이 다시 기운나게 북 돋웁니다.
꿈꾸게 해 줍니다.
꽃길에서 그대를 맨발로 달려나가서 맞아보고 싶어요.
꽃같은 그대를 만나는 날을 고대 하면서...
꽃미녀■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 ㉑ 2021.4.30 "쓰레기장에 떨어진 꽃씨가 꽃밭 되는 세상을 꿈꾼다. 내가 그 꽃씨가 됐으면..." 꽃 이야기를 하라면 3박4일도 모자란다. 꽃에 미친 여자(꽃미녀)는 지난해 60세를 맞으며 남편에게 선언했다. 겨울 농번기를 빼고는 꽃 키우는데 전념 하겠노라고... 귤밭을 싹~ 밀어내고 꽃밭을 만들지는 않겠지만(귤나무도 꽃나무라) 야금야금 귤밭을 비집고 들어서서 꽃들로 채우면 귤밭인가 꽃밭인가 싶은 꽃동산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희번덕거리는 남편의 눈초리에도 아랑곳 않고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꽃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지난해, 30년도 더 된 낡은 귤창고를 최소의 비용으로 리모델링해 쉼터 겸 작업실을 만들고, 지난해는 그동안 여기저기서 세 들어 살듯이 키우던 꽃나무들을 이사 시켰다. 늘 생업이 우선이라서 맘껏 키우지 못해서 아쉬웠던 꽃밭을 이제부터는 맘껏 키우리라며. 그사이 하나씩 둘씩 키우던 꽃들은 귤나무 아래나, 귀퉁이 빈땅에 질서 없이 심어 놓아서 남편이 어수선하다고 핀잔하며 예초기로 날려버리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꽃이 꽃답게 공간을 만들어 줬다. 그래도 더 과감하게 귤밭을 밀어버리고 하지는 못하고 귤나무 몇 그루를 이사시키고 옹기종기 한 곳에 모았다. 그동안 한 뼘 가지를 삽목해 키운 아이들이라 비싼 꽃나무는 하나도 없다. 온통 꽃으로 물든 내 유전자는 형편에 맞게 선호도가 정해졌는지, 키 낮은 꽃, 풀꽃, 들꽃들을 좋아했다. 화려한 꽃이나 흔하게 보는 길거리 조성용 꽃들은 애정하지 않고 애잔한 들꽃들을 좋아했다. 엉겅퀴에 매료됐고, 구절초 흰꽃에 넋을 잃기도 했다. 흰색과 보라색 꽃들을 좋아했지만, 점점 더 다양한 꽃들과 화사한 색들에도 눈이 가는 것을 보니 사랑은 움직이는 것 같다. 장미대신 찔레를 심었는데, 이제는 장미도 눈길이 가고 빨간 양귀비꽃도 가슴을 흔드는 것을 보니 감정도 나이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수수하지만 단아한 꽃들이 좋았는데, 이제는 도발적으로 튀는 아이들에도 눈길이 머문다. 네모라서 싫고, 세모라서 좋고 하던 기호가, ‘네모도 예쁘고 세모도 예쁘네~’ 하는 것을 보니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래서 꽃밭을 만들 때도 여러 아이들을 섞어서 심었다. 가능하면 개화기가 오래인 꽃, 사계절 돌아가며 피는 꽃밭이 되려고 심다보니 또 여백이 없는 꽃밭이 돼가고 있다. 빼곡히 만물상이 돼 가려고 하나 이것도 나다움이라고 우겨본다. 옹기종기 모여서 어깨 부비며 서로의 예쁨을 바라보는 행복한 꽃밭이 되기를. 내안의 그 무엇이 나를 꽃에 미치게 했는지 모르지만, “하느님, 감사합니다, 꽃에 미치게 해 주셔서~”라고 기도한다. 꽃은 나를 즐겁게도 했고, 눈을 맑게 해 줬고 마음 안의 티끌도 씻어내려 줬다. 촉수가 돈으로 향했다면, 숨기려고 위장해도 흘러나오는 탐욕을 어찌 감당했으랴~ 가난한 고학생 시절에도 화분 몇 개로 나를 달랬고, 옥탑방에서 시작했던 신혼기에도 나팔꽃 아치를 만들어서 나만의 운치를 누렸기에 꽃과 식물은 내 영혼을 늘 푸르게 지켜줬다. 제주도에 와서 귤밭이 꽃밭으로 보여서 귤농부가 된 것도 신이 내게 인도하신 은총이라고 느낀다. 꽃씨 하나가 쓰레기장에 떨어져서 꽃밭이 되게 하는, 그런 세상을 꿈꾸며 내가 그 꽃씨가 됐으면 좋겠다. 꽃, 함께 했던 매순간이 행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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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태민안 귤나무■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 ㉒ 2021.5.14
"지인들의 귤나무를
정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겨우내 드실 수 있는
양을 물어 보고
귤나무에 이름표를 걸었다."
‘국태민안’(國泰民安;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다는 뜻)이라는 거국적인 이름을 귤나무에 달았다.
나라가 편안해야 민초들의 삶도 윤택해질 것 같아서 염원을 담아서 귤나무에 이름을 걸었다.
귤나무에 이름을 다는 행사는 2008년부터 시작했었다.
2005년부터 귤농사를 시작하고, 막무가내로 유기농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농사도 모르고, 귤농사도 모르고 제주도에 연고도 전혀 없는 여자가
수십 년 경력의 농부도 도리질하는 유기농 귤농사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도전한 것이다.
이런 것을 기백이라고 하기에는 역설적이라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는 말로 나를 대변해 본다.
농사에 문외한이므로 농사에 무지하고 판매도 경험이 없었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스스로 생각해봐도 나는 여러모로 연구대상이다.
유기농 귤농사를 짓는 방법은 근처에 EM센터가 있어서 교육을 받고 그대로 따라했다.
농사일이 몸에 배지 않아서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남들이 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기에 적응해 나갔다. 난제는 어렵게 수확을 했지만 판매가 막막하다는 것이었다.
못난이 유기농귤을 수매하는 상인이 없어서 부득이 직거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있을 때부터 재미로 글 올리던 블로그에 귤농사를 짓기 시작할 때부터의 이야기를 올렸다.
그때만 해도 내 일상 이야기였지 판로로 연결될 줄 몰랐다.
귤을 수확하고 남들처럼 상인에게 팔려고 했으나
상인은 못난이귤을 비상품으로 취급하며 파치값으로 쳐주겠다고 했다. 유기농산물이 파치(破치)로 취급받다니...
차라리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겠다하는 마음으로 블로그에 사연을 올리니 블로거들이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보편 활성화된 블로그 마케팅이지만 그때 만해도 물건을 보지 않고 어떻게 사나 싶은 마음이
나도 있었던 시절이라서 온라인상거래가 너무나 신기했다.
주문이 들어오자 감격해서 초딩 세 아이들이 귤을 하나씩 닦고,
남편은 가지런히 일렬로 담아서 10㎏ 상자에 넘치게 보냈다.
한 상자 포장하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즐거운 마음으로 몇 년 동안 그 방식으로 유기농귤을 판매했다.
남편이 퇴직하고 전업농이 되고나니 수확량이 많아지면서 포장방식을 바꿨다.
그 대신 철저하게 완숙과 수확으로 맛을 차별화했다.
여러 유통 경로를 거치면서 신선도도 떨어지고, 미리 따서 맛도 떨어지는 시장의 귤과는 비교가 안 되는
농장직송의 신선한 유기농귤 맛을 본 소비자들은 눈이 번쩍 뜨였는지,
이듬해는 수확하면서 일주일 만에 주문이 마감됐다.
즐거운 비명이었으나 가까운 지인들이 그해 우리 귤을 맛볼 수가 없게 돼 안타까웠다.
궁리 끝에 지인들의 귤나무를 정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겨우 내내 귤을 드실 수 있는 양을 물어 보고 귤나무에 이름표를 걸어줬다.
귤나무에 이름 걸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회원님들과 더 돈독해진 귤나무 이름표 걸기는 해마다 몇 차례 태풍을 겪으면서 중단했으나
올해는 태풍 끝나고 다시 걸려고 한다.
반디농장에 다시 축제를 만들어야겠다.
내 귤나무는 ‘꿈은 이뤄진다’.
5천년 역사의 대한민국 귤나무는 ‘국태민안’.
하하하하하...귤나무가 함박웃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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