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반짓고리
막내 예인이 학생 문화원에서 무료로 가르켜 주는 종이 구슬 공예반에 들어서
고사리 손으로 컵 받침,목걸이,선물 상자등을 만들었다.
좁쌀 알만한 구슬을 낚시줄에 꿰어서 목걸이를 만드는데
엄마는 도와 주려고 해도 눈이 아삼삼하여 바늘에 실 꿰듯이 잘 안되는데
제 앞에 놓인 과제라고 작은 입을 앙 다물고
열심히 꿰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니 대견함인데도 콧등이 찡해온다.
"그새 많이 컸구나" 싶은데...
기뻐도 찡~...슬퍼도 찡~...
주책없이 많은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고여서
아이들 앞에서 부끄럽게 여겨질 때도 많은데
어미라면서도 아직도 이렇다.
바람에,감성에,회한에,삶에... 늘상 흔들린다.
아이들이 크니 모두 제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서로 자기 물건에는 손도 못대게하며 싸우는지라
막내가 쓸 보조 가방을 하나 만들어 보았다.
쑥쑥 크는 아이들이라 작아진 옷을 물려받고, 물려주고 하였어도
요즘은 떨어져 못 입는 시절이 아니라 늘 천이 아깝다.
작아진 청바지 하나 꺼내어서 작은 보조 가방을 하나 만들었다.
시어머니께 물려받은 발 재봉틀은 서울집 지하실에 두고 와서
곱지않은 손 밖음질이나마 밤새워 한뜸한뜸 뜨며 작은 조각들을 이어서
막내를 위해 어설프나마 가방 하나 만들었더니 아이가 좋아라 한다.
아직은 디자인도,맵씨도 잘 모르는 나이라 무조건 엄마가 해 준거라면
좋아하는 나이니까 한동안은 좋아라하면서 애용 하겠지.
투박해도 엄마가 만든 것이라서 소중하다고 여겨준다면 엄마가 고맙지.
평범한 봉급쟁이 혼자 벌어서 세 아이 키운다면
물려받은 재산이라도 있지 싶은게 요즘 실정인데
유산을 물려 받은 것도 아니고,고소득 봉급 생활자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샐러리맨의 아내로서 가계를 꾸려 가려면
초인적인(?) 현란한 알뜰 수법을 구사하여야만 한다.
나의 지상 최대의 고민.
구차스럽지도 않으면서,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자존심을 지키면서...아이들에게 부족하지 않게 기회를 제공하면서...
그렇게 가계부를 쓰자하니...돌아가지 않는 머리에 늘 과부하가 걸리곤 한다.
내 나라 형편으로 봐서 어찌 그리들 호사스럽게
해외 여행객이 줄을 잇는지 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긴데
어쩌면 나와는 먼 이야기들이 그리도 많은지 갈피를 잡기도 어렵고,
중심을 지키기란 초인적인 인내를 요구하는 이 시대에 살고있는
평범 아줌마인 나로서는...남들이 다 하는 물결에서
내 형편에 맞게...분수에 맞게...흔들리지 않게...소신껏
살아 가려면 웬만한 바람에는 끄덕도 않는 고집과 깡다구와...
반 귀머거리 생활을 고수해야만 하는 현실과 늘 담판을 짓는 심정이다.
내 고집의 하나가 엄마를 연상케해주는 반짓고리이다.
나의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좌절하지도 않고
오직 자식들만을 위해 일념으로 사셨던 내 어마니의 삶을 반추시켜 주는
나의 반짓고리는 내 삶이 엄마의 삶보다는 얼마나 더 윤택하며,
사치스러운가를 일깨워 주는 소중한 보물이다.
근면, 검소를 실천하며 몸소 보여 주셨던 내 어머니를 떠올리면
지금의 나와 내 나이때의 내 엄마의 삶을 비교해 보면
아직도 난 여전히 응석 투성이의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곤 한다.
낮 동안 쉴새없이 바깥 일을 하시고도 밤에는 흐린 불빛 아래서
헤진 옷은 깁기도 하고,새 옷을 만들기도 하셨던 내 어머니를 떠 올리며...
내가 물려받은 유산이 내 어머니의 근면, 검소이다.
결혼할 때 내가 정한 혼수 필수품은
벽장을 가득 채울수 있는 책장과 재봉틀이었는데
마침 시댁에 옛날 시어머님이 쓰시던 발 재봉틀이 있다하여
친정 엄마의 발 재봉틀을 두고 왔었다.요즘처럼 옷을 만들기보다는
사는게 더 싼 시절에 재봉틀의 의미가 또 다른 방편이 되었겠지만
(취미로서하는 홈 인테리어용)
내게 있어서 재봉틀의 의미는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가라는
시어머님과 친정 엄마의 상징적인 언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더 어려운 시절에도 자식들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씀 하시듯...
내 안의 힘을 이끌어 내어 주는 마술 램프 역활을 하는 존재이다.
내 나이때의 나의 엄마 생각을 떠올려 본다.
따져보니 막내 남동생을 낳으신 나이가 내가 막내를 낳은 나이와 같고
그위에 내 나이가 막내와 네살 차이니 지금 나의 둘째 아이 나이 때이었다.
나의 남동생이 7세 조기 입학하였던 해.내가 4학년이고 엄마 나이가
44세였으니 꼭 나와 같은 나이 였었다. 위로 큰 언니는 막내 남동생과
거의 20년이 넘는 차이가 있었지만...
나의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딸 넷에 아들 하나를 낳으신 엄마가
그 귀한 막내 아들을 7세 조기 입학 시켰으나 학교가 너무 멀어서
대처로 나가시기로 결심 하시고,이듬해에 중학교에 가는 언니의 등록금을 위해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개울에서 자갈 줍는 일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자갈 한 트럭에 얼마라서...두해전에 금광산을 하시던 아버지가
광산이 매몰되는 사고를 겪어서 집안이 풍비 박산이 난 지경이 되었는데
엄마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 교육은 시키겠다는 각오로
삼복 더위에 자갈을 캐서 수십대 분량을 채워서 내 위의 언니를
중학교에 보내고,막내 남동생을 위해 대처로 나왔었다.
돌아보니...내 엄마는 내 나이에...그렇게도 강하게 살았었구나 싶으니
내 앞의 고민이 아주 작고 부끄럽게 느껴진다.
삶을 고민할 겨를도 없이, 쉼없이 최선을 다해 자식을 위해 사셨던
내 어머니의 강인함을 되새기면서...오늘 내 앞에 놓인 내 삶이
벅차다 어이 말할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뜸 한뜸 박음질을 하니
내 안에 깊숙이 웅크리고 있던 용기들이 기지개를 켜고
떨치고 일어나려 준비 하는것 같았다.
마음이 약해지고,위축되고,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힐 때
내 어머니를 떠 올리면...내 삶은 아직도 너무 많은 여백이 있는것만 같다.
자기 주장이 강해서 이 엄마를 벅차게 하는 둘째 예지가
이곳 서귀포로 와서 맘껏 나래를 펴는지...서울에서 언니 그늘에 가려 있다가
요즘 대외적인 행사에서 상을 몇번 타오게 되자
목에 힘주고...기세 등등...이번 여름 방학에 이곳 시내 초등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한 여름 방학 독서 교실에서
60명중 7명에게 주는 상을 타게 되었다고...
부상으로 도서 상품권 4장에 문구세트를 받아와서
언니 동생이 부러워 하라고 며칠을 TV위에 전시를 해 놓고도 모자라
엄마 칼럼에 자기 상 사진을 만천하에 공개해 달라하니
"그 정도를 뭐~"하는 엄마 맘이지만...
달리는 말에 당근을 주는 효과를 생각해서 부끄러운 고슴도치 에미가 되기로....
으이그...(가문에 영광이다!)
초등때 반장 안해 본 사람 있나~상 안타 본 사람 있나~~~
그런 소리 듣는것 뻔히 알면서도...자식 일이라면 기꺼이 고슴도치 되는
엄마들 마음에 누가 돌을 던질수 있으리요하며....
둘째놈의 성화에 못이겨 자랑 한 컷 올린다.
자랑스런 나의 둘째딸 상장입네다.
2002.8.9.英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