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여름
요즘 전국적으로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니 여기저기서 "덥다 더워~"소리가 절로 나온다.
나또한 눈은 멀건 한물간 동태 눈에 몸은 팅팅 불어 해파리처럼 흐느적 거리고...
정신은 비몽사몽. 이곳 제주도는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않은 내가 느끼기엔
너무 많은 습도와 해풍에 실려오는 소금기등등...
풍토병이란 말이 절로 떠오르게 하는 요즘이다.
거기다가 시대를 역행하며 사는 고집(?) 때문에 에어콘 없고, 자동차 없고...
문명의 혜택이라곤 최소한만 받고 살려는 내겐...요즘 그간 고수해 온
내 생활 철학이 뿌리째 흔들리려 하고 있다. 이웃의 말이 이곳에서는
에어콘이 필수라는 말에 자연풍이 몸에 최고 좋다는 고집으로 묵살한 나인데
봄서부터 고사리 장마라는 궂은 날씨가 여름까지 계속되는 이곳 기후가
너무 습도가 높아서 여름에도 필히 보일러 틀고 에어컨까지 켜야 한다는
이곳 생활이 이제야 실감이 나고 있다.
무더운데다가 습도까지 높은 날은 고온다습한 기온이 정신까지 이상하게 만든다는
열대 우림지역의 증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
자연에 굶주린 내가 이곳 풍광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몽롱한 줄 알았더니
이제보니 이 기후에 내 몸이 흐늘거리면서 녹아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10년만에 찾아온 무더위라나...요즘 대서특필하며
이상 기온인 살인 더위도 재난에 넣어야 한다느니...
그 정도로 지구 온난화 현상이 우리에게도 실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는데...
그럼 10년만에 찾아온 더위라면...
그 10년전인 1994년은 내게 어떤 해였나?하고 떠올려 보았다.
전신 마취 네번의 영향인가 자연스런 치매 증상인가
요즘의 내 기억으로 10년전 일을 상세히 기억한다는 것은 정말 치하 받아야 할 일인데...
신통하게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우선...내게 늘 정면 도전으로 내 부모의 위상을 흔들리게 하고
시시때때 파도없는 일상은 무미건조하다고 뒤흔들어대는 나의 애물단지
둘째가 그해 여름에 목소리도 우렁차게, 기골도 장대하게(날때부터 그놈은 그랬다)
이 세상에 첫 걸음을 하신거다. 1994년 6월6일, 수술해서 낳는 아이라
이왕이면 생일을 쉬는 날로 해주자고 현충일에 나온 아이인데
그해 여름은 6월부터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다.
산모가 이불쓰고 몸조리 한다는 것은 오븐속에 든 통닭과 마친가지라
후일 생각할 겨를없이 찬물에 풍덩 들어가고 싶었으니 어찌 몸조리가 되었으리.
둘째놈은 날때부터 내겐 예삿놈으로 오지않고 버겁게 오더니 나자마자 먹성도
첫째아이 두배로 먹어 대는 것이 처음에는잘 먹는 아이가 이쁘다 하였는데
그 먹성이 욕심으로,넘치는 에너지로 이 에미의 위상까지 뒤흔들기 예사인
놈이 되었다.
그때만해도...난 이 나이에 이리 골골대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었다.
그해 연초에 둘째도 뱃속에 있고 큰 아이도 엄마와의 분리 불안증으로 심한
정서 장애를 일으키기에 회사를 눈물을 머금고 퇴사를 하고 나서도
난 가만 있지를 못하고...학교 다닐때 아르바이트하던 경력을 살려서
조카들 과외 선생을 자처하여 조카와 그애 친구등 중3짜리 3명을 집으로 불러서
과외까지 하고 있었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그런 기질이라 돌 지난 아이에다가
배가 남산만한 임산부에게 멀리서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사명감을 느껴서
둘째낳고 한달후에 바로 또 과외를 재개 했었다.
그야말로 푹푹찌는 더위에 아기들 앵앵~거리는 것을 달래가며...
중3짜리 머슴아 세명과 그 여름 방학을 보낸 기억을 떠 올리니...
햐~내게 그런 시절이 다 있었나~싶다.
삶의 에너지가 충천하여 내겐 그 어떤 장애물도 두렵지 않게 생각 되었었지.
개인 괴외 대상이란 어떤 부류인가~
아주 뛰어난 아이들이 더 뛰어난 부류에 속하기위해 받는 특별 고액 과외가 있지만
주로 내가 맡은 아이들은 학원에서도 실패한 아이들이었다.
학원을 보내도, 개인 과외를 해도 별 신통치 않아
부모 애간장을 녹이는 의욕 상실아들이 주로 내게 왔었다.
부모님의 파산으로 어쩔수없이 홀로서기해야했던 내 학창 시절은 그렇게
구제불능에 가까운 의욕 상실증 아이들을 가르키면서 연명(?)해야 했어서
그것도 다년간 경력을 쌓다보니 한눈에 보아도 척...수준과 결과를 가늠할수 있을 지경이었다.
부모들은 대부분..."이 아이는 초등때는 잘 했는데 점점 떨어졌어요" 하고 말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 학습 부진아들은 산만하기 그지없고,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어서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부모님 기대처럼 단기간에 치료될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들을 가득 안고 있었다.
그런 녀석들을 단기간에 결과를 기대하는 부모님들 때문에 과외 선생은 참으로
진을 빼는 중노동임을 난 체험으로 알고 있는데...
내게 온 조카와 친구들은 그렇게 심각한 수준의 아이들은 아니었으나
부모님이 기대할만큼 단기간에 상위권으로 도달할 아이들도 아니었다.
중간 이상은 되는데 기본이 튼튼치 않아서 치료하기에는 장시간이 필요한 아이들.
그래도 인간성들은 그런 아이들이 차가운 영재들보다도 훨씬 따뜻하여서
난 그런 아이들이 참 좋았었다. 이눔아~하고 마구 쥐어 박아도 씨익~웃는 녀석들이...
(똘똘한 영재들은 감히 쥐어 박지도 못할뿐만 아니라
선생이 비교 관찰 대상까지 되는 께름직한 관계가 많은데...
녀석들은 마구 주물러도 편한 상대들이었었다.)
갓난 아이 둘 딸린 아줌마 과외 선생이 장시간 녀석들을 불러 들이려면...
열정외에 더 큰 무엇이 있겠는가?
돌 지난 첫째 아이는 오빠들 공부하는 상위로 올라와서 가끔 쇼우도 하고
백일도 안된 둘째는 흔들 침대에 눕혀서 한 손으로 흔들어 대며...
"집중~~~~"을 외치며 땀이 비오듯하던 1994년 여름을 난 장하게 보내고 있었지.
그리고...한참 먹성 좋던 녀석들에게 난 과외비로 받은것의 절반을 간식비로 쏟아 부었으니...
내 비록 나이롱 과외 선생이라해도 공부 가르켜주지, 먹을것 실컷 주지...
무제한 가르켜주지...성적 올라갈때까지 기를 쓰고 물고 늘어지지...
누가 나와같은 과외 선생이 있을까~~~^^
그 덕분에 그 열악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아가들이 수시로 상위로 등장하고
공부하다가 응가 기저귀 갈아대고...ㅋㅋ...)
그 먼 거리에서도 그 녀석들이 하루도 빼지않고 우리집으로 딸랑거리며 찾아든 그해 여름.
그때만해도 내 치기가 쌩쌩하게 살아있던 시절이라 기어이 성적을 목표달성하게
만들었으니...
내게 중독된(?) 그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그 동생들까지 딸려서 보냈기에
그때만해도 내 수입도 제법 쏠쏠하여서 우리집 가계에 기여를 하고 있어서
기세등등하던 시절이 었었다.(어쩌면 요즘 내가 백수로 살면서도 기 안 죽고
남편에게 큰소리 치는 것도 이런 열정으로 기둥 뿌리를 함께 일군 그 시절이 있었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그후...그 동생 녀석들까지 3년 동안 맡고서...난 우리집이 재건축하여
이사하는 바람에 과외 선생의 부업을 청산 하였었다.
요리사가 과외 선생이라니...싶겠지만 과외 선생은 요리사 되기전의 내 생활 수단이었고...
요리사는 기술이 있으면 어떤 자리에서도 소신껏 살 수 있지 않을까하던
나름의 철학으로하여 선택했던 차선의 길이 었었다.
내 치열했던 1994년 여름을 떠올리면...지금의 난...
무위도식하며, 무사 안일하며 바람 빠진 풍선같은 상태이다.
기력도 달리고, 의욕도 줄고,용기도 점점 오그라 들고
아무것도 없어도 언제나 큰소리 칠수 있던 그 패기도 꼬리를 감추고 있다.
실수도 많았지만 겁없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는데...
의욕 상실증 아이들에게 없는 용기를 만들어서 팽팽하게 불어 넣어주던 투우사였는데...
그후...10년이 흘렀구나.
아~그 패기가 그립다.
실수해도 좋았던 그 시절의 희망찬 나날들이 좋았다.
이번 여름...그때처럼 덥다해도...난 다시 그날들을 반추하며
내 찢어지고 헝클어진 날개를 손질해 봐야겠다.
사오정이니하는 단어에 위축되 가고 있는 요즘의 나.
다시...젊어지기위해...나를 가다듬어 보아야겠다.
무더위...열정이 있는 사람에겐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씩씩하게 말할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다시 나를 만들어야겠다.
아자 아자~~
내게 힘을 내자고 스스로 다짐해 본다.
무더위야 물러 가라잇!
2004.7.24.英蘭